파성부원군 효성공 경지 윤인경
1476(성종 7)∼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지(鏡之). 순(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흥(繼興)이고, 아버지는 부사정 구(昫)이며, 어머니는 유종(柳琮)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했으며, 특히 문장에 능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506년 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성균관학록에 선발되었고,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봉교에 이어 다시 성균관전적에 올랐으며, 예조좌랑·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거쳐 1511년(중종 6) 장악원첨정에 이르렀다.
외직으로 나가 태안군수로 근무하는 동안,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사직하고 양주의 여막에서 죽을 먹으며 3년 간 시묘하니, 효행이 널리 알려져 명망이 더욱 높았다.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등이 몰려난 직후인 1520년에 사간원사간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529년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어서 승정원의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을 때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로 오히려 승진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옮겨 공조참판을 지내고, 1532년 예조참판으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펴고 돌아왔다.
그 해에 다시 외직인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당시 흉황이 심한 경상도 지방의 진휼(賑恤)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라 예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37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해에 김안로(金安老)가 사사되고 그 일당이 제거되었는데, 이조판서로서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을 등용하였다.
다시 호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40년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5년 동안 우의정을 지내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어 명종이 즉위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소윤(小尹)에 가담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사람의 의표(儀表 : 겉으로 드러난 자세나 표정)가 의연하고, 평생 나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관용하였다. 좋은 일을 대하면 반드시 기뻐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힘쓰지 않았으니, 국사 처리에 있어 대체(大體)를 유지하였다. 시호는 효성(孝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인경[尹仁鏡](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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