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공주)묘

(문종) 경혜공주, 영양위 정종[헌민공]

보현당 2012. 7. 14.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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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 영양위 헌민공 정종

 

 

<<경혜공주(敬惠公主) 묘지명>>

 

공주는 문종대왕의 따님으로 어머님 권씨(權氏)는 문종이 즉위하신 뒤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책(追冊)되었다. 안동의 대성(大姓)인 고려의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인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권전(權專)이 태부(太傅)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12대손인 부정(副正) 최용(崔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태종 18년(1418)에 왕후를 낳으니 세종 13년(1431)에 세자빈으로 뽑히어 동궁(東宮)으로 들어와 문종을 모시었다. 세종 17년(1435)에 공주를 낳아 세종 32년(1450)에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다. 종(悰)은 영의정에 추증된 정도공(貞度公) 역(易)의 손자요, 형조참판 충경(忠敬)의 아들이다. 단종 3년(1455)에 종(悰)이 광주로 귀양가자 공주도 함께 따라가 보통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갖은 곤욕을 두루 겪으면서도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하여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종(悰)이 마침내 죽게 되자 공주는 슬퍼하며 예절을 다하고 어린 아들을 어루만져 기르니, 사람들이 공주의 팔자 기박함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 아내로서의 도리를 장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세조 8년(1461)에 세조가 내관을 보내 서울로 불러 돌아오게 한 다음 특별히 노비 50명을 내리고 일품록을 주어 평생을 마치게 했고, 세조 11년(1465)에는 집을 한 구(區)를 내렸으며, 예종(睿宗) 원년(1469)에는 예종이 또 노비 50명을 내리고, 대왕대비가 더욱 보살피며 사랑하여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혹 여러 날 묵는 일도 있었다. 성종(成宗) 4년(1473) 섣달에 병을 얻으니 임금께서 내의(內醫)를 보내고 아울러 약을 내려 치료케 했으나 효력을 보지 못하고 28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치시니 그 때 나이 39세이었다.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임금께서 관원을 보내 조상과 제사를 드리게 하고 관에서 장례일을 맡게 하여 이듬해인 성종 5년(1474) 3월 29일 고양(高陽) 망산(望山) 동향(酉坐)터에 산소를 모셨다. 공주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으니 아들은 이름이 미수(眉壽)로 지금 돈령부 참봉으로 있고 딸은 아직 어리다.

새겨 말하노니 사람이 태어나면 잘되고 못되며 오래살고 일찍 죽는 것이 그 사이에 명이 있어 아득히 잡을 길이 없는지라 어찌 이를 기필 할 수 있으리요. 공주의 귀한 몸으로 그 복을 누리지 못하고, 거룩한 덕을 지니고도 수를 누리시지 못했음은 어째서인가. 그러나 하늘의 갚아줌은 엉성하면서도 빈틈이 없나니 남은 경사가 반드시 자손 대에 더욱 커지리라. 내 여기서 하늘의 명이 어김이 없음을 시험하게 될 줄 아노라.

성화 10년 4월 10일지

위 기록은 이승소(李承召)의 문집에 나와 있는데 뒤에 무덤을 고쳐 만들 때 이를 확인하고 다시 묻었다.

 

 

 

 

 

 

 

 

 

 

<<영양위 헌민공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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