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옹주)묘

(선조) 정안옹주, 금양위 분서 박미 -반남박씨-

보현당 2016. 7. 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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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옹주, 금양위 분서 박미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참찬 동량(東亮)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1603년(선조 36)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유15)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 에 서용되었다. 1638년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법은 중국의 오흥(吳興)을 따랐는데, 지금까지 참판 박이서비(朴#이23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과 교유하였다. 조카 세채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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