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묘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양회성

보현당 2016. 10. 1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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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열사 양회성


약력
1952년 2월 18일 전남순천 출생
2008년 3월      용산 4지구 상공철거민 대책 위원회 건설
2009년 1월 19일 새벽 철거민 생존권 쟁취를 위해,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농성 돌입.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특공대의 무자비한 살인진압으로 사망. 당일 시신 강제부검 당함.
2010년 1월 9일 355일 만에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범국민장’을 치름.
 

동지의 삶과 죽음 
본인이 직접 요리하며 일식당을 운영하던 양회성 열사는 두 아들과 함께 일식당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셨다. IMF로 인해 몇 차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가족들과의 약속, 아들들과 이루고 싶었던 꿈을 생각하며 꿋꿋이 살아오셨다. 2004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빚을 내어 용산국제빌딩 옆에 삼호복집을 차렸다. 새 출발의 기쁨도 잠시, 용산에 가게를 연지 이년 만에 재개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5,6년은 더 걸릴 것 같던 개발이 벼락치기처럼 진행되면서, 철거용역 깡패들에 의한 행패가 시작되었다. 대책 없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맞서,  2008년 3월 전국철거민연합 산하의 ‘용산4지구 상공철거민 대책위원회’를 건설하여,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셨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전철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존권 문제를 넘어서, 잘못된 개발악법을 바꾸겠다는 열의를 다하셨다. 2009년 1월 19일, 양회성 열사는 구청의 외면과 조합과 용역의 폭력에 내몰리던 세입자들과 함께 용산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여기, 사람이 있다”, “대책 없는 살인개발 중단하라”, “철거민 주거,생존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거농성에 돌입하였으나,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 무자비한 살인진압과정에서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하여 사망하셨다. 2010년 1월 9일, 355일 만에 치러진 장례 후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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