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묘

(문신) 성재 정간공 신익상 , 정경부인 함양박씨 -고령신씨-

보현당 2023. 6. 1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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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인조 12)∼1697(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필(叔弼), 호는 성재(醒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벌(申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신응구(申應榘)이고, 아버지는 정언 신양(申湸)이다.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경(李坰)의 딸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시를 거쳐 166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봉교를 거쳐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사실을 곧게 기록하여 명성을 얻었다. 1672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숙종 즉위 후 남인이 득세하자, 충청도 아산에 은거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특지(特旨)로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 이조참판·전라도관찰사·부제학·대사성을 거쳐, 1684년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재임시 주변 읍민을 동원하고 공명첩(空名帖: 관청에서 부유층에게 곡식을 받고 관직은 써주나 이름을 적지 않던 임명장)을 발급하는 방법으로 영변의 철옹외성(鐵甕外城)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대사헌·이조참판·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민비(閔妃)가 폐위되자 그 부당함을 논하고 양주로 퇴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때 다시 기용되어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교리로 있으면서 복창군(福昌君)이정(李楨) 등의 방종을 형벌할 것과 시무(時務)를 논한 상소를 올려, 뒤에 숙종으로부터 선견지명을 인정받았다. 대사간 재임 때는 윤휴(尹鑴)의 처자를 연좌하고 적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필법, 특히 전서(篆書)에 조예가 깊었다. 시문집으로 『성재집』3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익상 [申翼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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