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묘

(무신) 성우 어재연 [충장공]

보현당 2013. 3. 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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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성우 이재연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아버지는 용인(用仁)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주부·판관·첨정·총위영초관·형조정랑을 역임한 뒤 1847년 광양현감이 되었다. 재임시 환곡 업무를 공정히 처리하고, 옥사를 잘 다스렸으며, 군기수선을 잘 하여 통정대부로 승급되었다. 1856년(철종 7) 해주진영(海州鎭營) 병마절도사를 거쳐 풍천부사가 되었다. 1862년 대구영장을 거쳐 1864년(고종 1) 장단부사가 되어 공정한 과세를 위해 힘써 고종에게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그해 프랑스 로즈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오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방어했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도적들을 토벌하고, 관내의 개시(開市)를 복구했으며, 별포대(別砲隊)를 설치해 국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1871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신미양요), 4월 15일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었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수륙양면에서 함포사격과 야포사격을 퍼붓고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말의 대학자 이건창(李建昌)은 그를 평하여 "청백강정(淸白剛正)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난 공적을 남겼다. 체격이 장대하고, 절인(絶人)의 힘이 있어서 세상사람들은 그를 장사(壯士)로 여겼다"고 했다.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자료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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