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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묘

(천주교) 주문모 야고보

by 보현당 201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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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사제 주문모 야고보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 (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성장하는 동안 그는 스스로 서양의 학문에 흥미를 느꼈으며 천주교 교리를 접하고는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중국 문학과 교회 신학에도 능통한 주문모 신부가 여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주 신부는 성무 집행을 위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고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사바)과 박 요한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삼엄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겨울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하였다.

겨울까지 주문모 신부는 만주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약속된 날짜에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난 뒤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였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들을 따라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까지는 12일이 걸렸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계동(현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여장을 풀고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어 1795년 성주간에는 세례와 보례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부활 대축일에는 마침내 조선 신자들을 위한 최초의 미사 성제를 봉헌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서 생활한 지 5개월 만에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당할 뻔하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신자들이 먼저 이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여회장인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때가 1795년 6월 27일(음력 5월 11일)이었다. 당시 집주인인 최인길과 주 신부의 입국에 참여한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다음날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에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후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을 사목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하였다.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자발적인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알기 쉬운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렇게 주문모 신부가 이 땅에서 활동한 기간은 6년이 조금 넘었다. 그 동안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6000명이 증가하여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는 잠시 중국으로 귀국할 결심을 하였다. 자신이 귀국한 사실이 드러나면 박해가 중지될 것이고 그후에는 다시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국 도중에 그는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모든 박해를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신자들의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음력 3월 11일 주문모 신부는 한양으로 돌아와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지만 주 신부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유를 묻자 주문모 신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조선에 온 것은 한 가지 목적뿐이오. 참된 종교를 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불쌍한 백성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었소."

박해자들은 할 수 없이 주문모 신부에게 군문효수형을 선고하였다. 참수 후에는 그의 목을 높이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형 집행 장소로 정해진 곳은 한강 근처의 '새남터'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형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았고 주 신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죄목을 나열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 다음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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