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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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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및 호국영령묘67

(독립운동가, 대한민국군인) 육군소장 권준 -안동김씨-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창설에 참여하였고, 조선의용대 비서장, 임시정부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육군대령,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 관료 ·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원명은 권중환(權重煥), 가명은 장수화(張樹華), 호는 백인(百忍) 또는 양무(揚武). 경상북도상주 출신.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고, 1921년 북경에서 동지들과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하고, 이후 의열단의 종로경찰서·총독부·동양척식회사에의 투탄사건과 동경 니쥬바시투탄의거[二重橋投彈義擧] 때 자금조달의 활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잡혀 일시 옥고를 겪은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1.. 2024. 3. 3.
(독립운동가) 의재 기산도 -행주기씨-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행주(幸州). 일명 기산도(奇山濤). 전라남도 장성 출신.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기재(奇宰)의 맏아들이다. 일찍이 기독교계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한국의 식민지화의 주구(走狗)를 살해하여 식민지화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5년(광무 9) 11월 박종섭(朴宗燮) · 박경하(朴敬夏) · 안한주(安漢周) · 이종대(李鍾大) 등과 저격무기를 구입한 뒤, 손성원(孫聖元) · 박용종(朴鎔鍾) · 김필현(金弼鉉) · 이태화(李太華) 등을 파견,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가 결사대본부인 한성모(韓聖模)의 집을 습.. 2024. 3. 3.
(대한민국 군인, 1212사태) 중령 김오랑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現 김해시 삼정동) 119번지에서 아버지 김종수와 어머니 임순이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57년 김해 소재 삼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또래보다 1년 늦게 김해중학교(10회)에 입학했으며 김해중학교를 졸업하고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했으나 학비 문제로 인해 등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5년에야 육군사관학교(25기)에 입교했다. 육사 동기로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황진하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69년에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첫 부임하게 되었다. 중위 진급 후 1970년 7월 맹호.. 2024. 2. 5.
(대한민국 육군, 1212사태) 병장 정선엽 대한민국 육군의 병장.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초병으로 근무하던 중 국방부에 진입하려던 반란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국방부를 지키다 전사한 유일한 희생자였으며, 사태 전체로 확대해 봐도 김오랑 중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 함께 반란 진압 중 전사한 유이한 인물이다. 전역이 3개월 가량 남았던 1979년 12월 13일 전두환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으로 '진도개 하나'가 발령되자 국방부에서 근무 중이던 군인들은 모두 경계근무에 배치되었다. 그의 선임은 전역을 앞둔 그를 배려해 보안실에 그를 배치하려고 했지만 그는 요충지인 B2 벙커에 후임 일병이 배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벙커 초병을 자원했다고 한다. 당시 50헌병중대 행정병 출신에 따르면 B2 벙커에.. 2024. 2. 5.
(대한광복군, 독립운동가, 외교관) 박영 -밀양박씨- 관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외교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건국포장)수여. 1921년 12월 20일 울산군에서 태어났다. 1944년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에 끌려가 소주에서 간부 후보생으로 훈련 받던 중 김영남, 류재영, 성동준, 최용덕, 정병훈, 김봉옥과 탈출하였다. 탈출 후 중국군 충의구국군사령부에 들어가 일본군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였고, 일본군 포로심문 및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의 탈출 사실은 중국 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54년 고등전형시험 외무과에 합격하였고, 국제연합대표부 근무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외무부 통상경제조사과장, 홍콩, 베트남 공화국, 뉴질랜드 참사관을 거쳐 1973년 주 뉴질랜드 대리 대사, 1974년 주 로스엔젤.. 2024. 2. 4.
(독립운동가, 교육자) 김명신 김명신(金明信)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로 3.1 만세 운동 당시 해주군의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 후에 석방되었다. 한국의 초기 여자 전도사 주룰루의 아들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자의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는 그의 사촌 누이에게 부군이 되었다. 한국의 초기 여자 전도사 주룰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박희도의 처사촌이다. 어머니 주룰루가 가정폭력을 피해 가출할 때 따라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곧 사망하여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의 3.1 만세 운동 직전 경성에서 만세 시위 유인물과 태극기를 인쇄하여 해주군으로 비밀리에 이송하였다. 3월 1일 3.1 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해주군 해주읍 내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최성모, 박희도, 오현경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 2023. 10. 19.
(애국지사) 박승유 -대전국립현충원-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44년 10월에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 중인 일본군 횡정(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무석(無錫), 무호(蕪湖), 남경(南京)지역에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던 터라서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같은 동포 사병들에 대한 반정(反正)권고와 염전(厭戰)가곡 등의 방송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2023. 9. 11.
(순국선열) 의병장 이능권 -국립 대전 현충원- 대한제국기 강화도에서 활약한 대동창의진의 의병장. 별명은 능한(能漢). 경기도 강화 출신. 한국군대의 육군대장으로서 1905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중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하러 가는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감시망을 뚫고 국외로 회송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해산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의 군인 300여 명을 규합, 편성한 의병부대의 의병장이 되어 강화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의병부대를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陣)이라 칭하고 이호춘(李浩春)·유성준(兪成俊)·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 등과 더불어 강화군 길상면의 방의표(方宜杓)로부터 군자금 1,500냥을 조달하는 등 11개 곳에서 4만3800냥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강화도 .. 2023. 9. 9.
(독립운동가) 김애순 -대전현충원, 김규식 배위-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황해도 장연 출신. 아버지는 김성섬(金聖蟾), 어머니는 안성은(安聖恩)이다. 송천학교를 마치고 상경,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학생들에게 우리 나라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쳤다. 이 일로 여러 번 단속을 당하고, 붙잡힐 기미가 보이자 1911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남경에서 중화명덕여자학원(中華明德女子學院)을 다녔다. 1919년 1월에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고 상해로 이주, 김규식·신석우(申錫雨)·선우혁(鮮于爀)·장덕수(張德秀)·여운형(呂運亨) 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 국내와 만주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 2023. 9. 8.
(애국지사) 민영숙[민옥금] -여흥민씨- 민영숙선생은 1919년 3월 10일경 충남 천안군(天安郡) 입장면(笠場面) 양대리(良垈里)에 소재한 사립광명여학교(私立光明女學校0에 재학 중 학우인 한이순(韓二順)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3월 20일 10시경 동교학생 80여명을 규합하여 양대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고, 이어 입장면 장터로 진출하여 장터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됨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7일 가출옥함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되었다. 2023.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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