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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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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및 호국영령묘67

(독립운동가) 임용우 -부안임씨- 독립운동가 임용우 1884년(고종 21) 경기도(지금의 인천광역시) 김포(金浦)에서 태어나, 10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뒤, 4년 동안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3년간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있다가 덕적면(德積面)에 사립 명덕학교(明德學校)를 설립하고 8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명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말에 천도교(天道敎) 측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29일에는 윤영규(尹寧圭)·최복석(崔復錫) 등과 월곶면(月串面) 갈산리(葛山里)·조강리(祖江里)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어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면서 항일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9일에는 덕적.. 2017. 9. 26.
(독립운동가) 어수갑 독립운동가 어수갑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8년 교동(校洞)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했다. 1909년 4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휘문의숙 예비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4월부터 1913년 3월까지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졸업했다. 이후 포천 청성학교(靑城學校)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3월 청성학교를 그만두고 1916년 5월 철원 사립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7월 퇴직했다. 1922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화요회에 가입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 2017. 9. 26.
(독립운동가) 전태순 독립운동가 전태순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김포군 양촌면(陽村面)에서 박충서(朴忠緖)가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 박승각(朴勝珏)·박승만(朴勝萬)·안성환(安聖煥) 등과 함께 격문과 선언문 10여매를 작성하여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후, 이날 양곡(陽谷)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는 등 일경의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다.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 9. 26.
(백마고지전투) 소령 김경진 김경진 소령은 1920년 9월 8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으며 국군 제9사단 소속으로 6.25전쟁 기간 1950년 11월 전북 대둔산과 경북 김천·상주지구 공비토벌작전, 12월 강원도 설악산·오대산지구 전투, 1952년 7월 김화지구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0월 김경진 소령(당시)은 제29연대 2대대장으로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396m 독립고지로서 작전상 요지 중의 요지였다. 전쟁 중 고지의 주인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바뀌고 하루 평균 5만발에 가까운 포탄이 쏟아져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치열한 고지공방전으로 불릴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 2017. 6. 6.
(백마고지전투) 중위 이성덕 이 소위는 1929년 1월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평양 제1중학교를 졸업한 후 6·25전쟁 중이던 1951년 7월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했다. 또 1952년 1월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제9보병사단 30연대 소대장으로 보직됐다. 이 소위가 소속된 제9보병사단은 중서부전선의 395고지(일명 백마고지) 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백마고지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철의 삼각지 서측에 위치한 고지다. 적에게 탈취당할 경우 미 제9군단 방어선은 물론 서울로 통하는 유엔군 보급로까지 위협받게 될 전략요충지였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고지 쟁탈을 위한 전투가 12회나 일어났다. 이 공방전에서 이 소위는 중공군 1개 중대의 공격을 막다가 적 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1.. 2017. 6. 6.
(백마고지전투) 육군상병 오규봉 1952년 10월 철의 삼각지인 백마고지 전투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30연대 1중대의 공격이 중단되었다. 이때 1소대의 오규봉 상병은 적 자동화기 진지를 폭파하기 위하여 대공포 판을 등에 메고 적 자동화기 진지로 돌진하였으며 소대장 강승우 소위와 안영권 일병은 화력으로 엄호사격을 하였다. 이 순간 소대장 강승우 소위가 티엔티와 박격포탄으로 적 특화점 공격을 결심, 기관총 진지의 7m까지 포복으로 전진 폭발물을 투척하려는 순간, 우측 팔에 총상을 입고 떨어뜨린 것을 안영권 일병이 잽싸게 주워 투척하고 오규봉 상병도 수류탄을 투척하여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산화함으로서 중대가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를 탈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들의 용감한 군인정신은 25회에 걸쳐 뺏고 빼앗기는 격전을 치른 백마고지 전.. 2017. 6. 6.
(이름없는 묘) 김 소위 (소위 김수영) 6·25전쟁 초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 경북 안강지구 도음산 전투에서 전사(1950.8.27.)어는 소대장(김 소위라는 것만 알고 있음)의 시신을 같이 전투에 참가했던 다른 부대의 한 소대장 (황규만)이 치열한 전투로 인해 급한 대로 능선 후사면 소나무 밑에 가매장 한 후 후일을 위해 돌로 표시를 하여 두고 다시 전투를 계속했다.전쟁은 끝나고 14년 뒤, 살아남은 황 소대장은 대령이 되어 1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그동안 잊지 못했던 이 전우의 시신을 찾기 위해 그 장소로 가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헤맨 끝에 시신을 발굴했다. 그러나 이름을 알 수 없어 국립묘지 안장을 할 수 없자 고민 끝에 육군참모 총장에게 이 사실을 청원, 승인을 받아 1964년 5월 29일 이름도 없이 국립묘지 제.. 2017. 6. 6.
(호국형제 묘) 하사 이만우(兄), 이등중사 이천우(弟) 故하 사 이만우(兄, 22세) : 30묘역 26549호 故이등중사 이천우(, 19세) : 30묘역 39591호 6ㆍ25 전쟁 당시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사랑하는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각각 정든 고향집을 떠났던 두 형제가 전사한 지 60년 만에 다시 만나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이들 형제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형님(故 하사 이만우)이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당시 18세이던 동생(故 이등중사 이천우) 또한 형님의 뒤를 이어 자원입대하였다. 각각 1사단과 7사단 소속으로 서울 수복작전에 이어 북진의 선봉에 서서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운 형제는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51년 5월 7일 고양지구전투에서 형님이 전사(화랑무공훈장 수훈)하고.. 2017. 6. 6.
(호국부자묘) 공군소령 박명렬(父), 공군대위 박인철(子) 故공군소령 박명렬(父) : 29묘역 3305호 故공군대위 박인철(子) : 29묘역 3557호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부자(제17전투비행단 故공군소령 박명렬(父, 31세), 제20전투비행단 故 공군대위 박인철 (子, 27세))가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임관 후 오직 호국의 일념으로 근무하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순직하여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아버지(故 소령 박명렬)는 1978년 3월 28일에 공군소위(공사 26기)로 임관하였고,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아들(故 대위 박인철)은 2004년 3월 17일 공군소위(공사 52기)로 임관하였다. 부자(父子)는 각각 제17전투비행단과 제20전투비행단 소속의 전투기 조종사로서 각종 훈련에 참가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2017. 6. 6.
(독립운동가, 정치가) 몽양 여운형 -함양여씨- 몽양 여운형 1886∼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 2017.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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