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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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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14

(애국지사) 박승유 -대전국립현충원-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44년 10월에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 중인 일본군 횡정(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무석(無錫), 무호(蕪湖), 남경(南京)지역에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던 터라서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같은 동포 사병들에 대한 반정(反正)권고와 염전(厭戰)가곡 등의 방송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2023. 9. 11.
(문신) 죽천 문익공 박정양, 정경부인 양주조씨, 정경부인 인동장씨 -반남박씨- 개항기 총리대신서리, 궁내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박제근(朴齊近)의 아들이다. 1866년(고종 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879년 형조참판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해 이용사(理用司)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2년 성균관대사성 · 이조참판 · 좌승지 등을 거쳐 1883년 이후 한성부(漢城府)좌윤(左尹) ·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 · 내무협판 ·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 사헌부대사헌 ·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 도승지 등을 지냈다.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하였다.. 2023. 5. 5.
(문신) 청백리 문청공 이병태, 정부인 반남박씨, 정부인 진주류씨 -한산이씨 1688(숙종 14)∼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아버지는 진사 이협(李浹)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릉참봉(思陵參奉)·평시서봉사·내자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받고, 누진 끝에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수찬에 올랐다. 1727년(영조 3) 예조참의로 있을 때 할아버지가 임진왜란으로 죽었기에, 의당 참의로서 하여야 할 왜서회답(倭書回答)의 예를 회피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호조참의가 되어, 노론계열로 탕평론을 배척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30년 경상도관찰사에 보직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며, 탕평책을.. 2023. 4. 21.
(문신) 충익공 기재 박동량, 정경부인 여흥민씨 -반남박씨- 충익공 기재 박동량 1569(선조 2)∼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선산 임씨(善山林氏)로 구령(九齡)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서 시중해 대중 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했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 해 동부승지·좌승지를 .. 2021. 7. 14.
(문신) 충헌공 금석 박준원 -반남박씨- 충헌공 금석 박준원 본관 반남, 자 평숙(平叔), 호 금석(錦石), 시호 충헌(忠獻), 김양행(金亮行)의 문인이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주부(主簿)가 되었다. 이듬해 딸이 수빈(綏嬪)이 되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공조좌랑이 되었다. 1790년 수빈이 순조를 낳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봉해지고, 호조참의가 되어 궁중에서 순조를 보도 하였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공조참판·판서(判書)를 거쳐 돈령부판사를 지내고,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형조판서·금위(禁衛)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저서 《소학문답(小學問答)》, 문집 《금석집》이 있다. 2018. 8. 5.
(문신) 나옹 박황, 정부인 남양홍씨 -반남박씨- 나옹 박황 1597(선조 30)∼1648(인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덕우(德雨), 호는 나옹(懦翁)·나헌(懦軒). 소(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복(應福)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동열(東說)이며, 어머니는 정엄(鄭淹)의 딸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동언(東彦)에게 입양되었다. 162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4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대사간·이조참의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화의에 반대한 척화신(斥和臣) 17인의 압송을 요구하자, 격분한 그는 “일대(一代)의 명사들을 모조리 호구(虎口 : 호랑이의 굴)에 보낼 수 없다... 2016. 9. 4.
(문신) 인기 박동언 [선조의 처남]. 정부인 광산정씨 -반남박씨- 인기 박동언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인기(仁起)이다.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의 아들이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동생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강원도소모사(江原道召募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집하는 등 활약하였다. 이후 한성부서윤·내승(內乘)·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역임하고, 외직인 철원부사(鐵原府使)·봉산군수(鳳山郡守) 등을 지냈다. 한편 봉산군수로 있던 1605년(선조 38)에는 근무를 게을리 하여 황해도 안문어사(黃海道按問御史) 이지완(李志完)의 탄핵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종2품 실직이 추증되었다. [네이버백과사전] 박동언 [朴東彦] (두산백과) 2016. 9. 4.
(선조) 정안옹주, 금양위 분서 박미 -반남박씨- 정안옹주, 금양위 분서 박미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참찬 동량(東亮)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1603년(선조 36)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유15)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2016. 7. 7.
(문신) 충익공 기재 박동량, 정경부인 여흥민씨 -반남박씨- 충익공 기재 박동량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선산 임씨(善山林氏)로 구령(九齡)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서 시중해 대중 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했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 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 2016. 7. 2.
(12) 효릉(孝陵) - 인종(仁宗), 인성왕후(仁聖王后) 반남박씨 효릉(孝陵) 인종(仁宗) 인성왕후(仁聖王后) 반남박씨 - 이름은 호(峼). 자는 천윤(天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신(儒臣)들과 옛 글을 강론(講論)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4년 11월에 즉위했으나 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기준(奇遵)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효릉(孝陵)이다. 시호는.. 201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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