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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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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묘44

(일본육군 군속 훈8등) 장해윤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군속으로 통역을 맡아 하북성 태항산 석가정 전투에서 충과의를 다하여 순국하는 공을 세웠다. 애석하게도 그때 나이 30세였다. 육군군속 8등 결과적으로 친일파.... 다른 훈8등을 받은 사람은 노덕술이다. 평가는 각자 몫으로....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들이 중국 하북성(河北省) 호가장(胡家庄)에서 일본군의 습격에 맞서 싸운 전투. 1938년 10월 중국 무한(武漢)에서 중국 관내 지역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으로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김원봉(金元鳳)을 총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 지구에 국한된 선.. 2024. 3. 17.
(정치인,종교인) 운석 장면 요한, 부인 김옥윤 마리아 여사 -인동장씨-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운석 장면 요한 1899년∼1966년. 정치가.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운석(雲石). 서울 출생. 일제강점기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장기빈(張箕彬)의 아들이다. 8세에 인천 사립박문학교에 입학,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5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학 문과를 마치고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일을 보았다. 1913년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에 부임, 1936년 이 학교 교장이 되고, 계성학교(啓星學校)의 교장직도 겸임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 2023. 12. 24.
(협객) 조일환 - 김두한 후계자 협객 조일환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다. 분명 좋은일도 많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했던것 같다. 조일환(曺一煥, 1938년~2009년 7월 13일)은 김두한의 후계자이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열일곱살이 되던 해방 전후 충남 천안 지역 주먹계를 평정한 뒤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천안 시내 유관순 동상 앞에서 새끼손가락을 잘라 항의한 바 있다. 2005년 3월에는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망언과 신사참배, 역사 교과서 왜곡 중단 반성을 촉구하며 조씨의 아내와 아들이 손가락을 절단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이후 2009년 7월 13일에 사망하였다. 2023. 10. 9.
(영화배우) 강효실 강효실(한국 한자: 姜孝實, 1932년 2월 10일 ~ 1996년 11월 2일)은 대한민국의 연기자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평양(平壤) 출생이다. 극단 ‘신협’에서부터 무대생활을 시작하였고, 영화도 수십 편에 출연하였다. 1960년대에는 극단 ‘산하(山河)’에서 연기활동을 하였다. 개성적이고 독특한 연기로 무대배우로서 각광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차범석 작 《열대어(熱帶魚)》, 베른슈타인의 《키부츠의 처녀》(1972)가 있다. 특히 극단 '드라마센터'의 《루브(Luv)》에서 신구·민승원과 출연하여 개성을 발휘한 열연을 보여 주었다. 17세이던 1950년에 평양국립극장 무대에 「맥베스」라는 작품으로 처음 올랐고, 1952년 극단 신협(新協) 단원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 영화계에도 진출.. 2023. 2. 8.
(미술사학자,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최희순] -양천최씨- 해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장,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 등을 역임한 학자. 미술사학자.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희순(熙淳)이며 순우(淳雨)는 필명이다. 호는 혜곡(兮谷). 종성(鐘聲)의 아들이다. 고유섭(高裕燮)의 감화로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미술과장·수석학예연구관·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직하여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마쳤다. 6·25사변 중에는 생명을 내걸고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였다. 1950년대 초반 서울 환도 등 혼란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세 번이나 이전, 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 2023. 1. 9.
(대한민국 국인) 대령 박흥주 -밀양박씨- 박흥주(朴興柱, 1939년 11월 15일 ~ 1980년 3월 6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44년 일가족과 함께 일제 강점기 경성부에 이주하여 1945년 조선 광복 이후로도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962년 육사 18기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육군 중위 시절 김재규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로 발령되었다. 1979년 김재규와 함께 10·26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당시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으므로 다른 피고인들보다 앞서 처형되었다. 그의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재판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재판 관련 해당 피고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 군 장교 신분으로 복무 .. 2022. 12. 30.
(영화배우) 최은희 -해주최씨-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배우 최은희는 1942년 연극 을 통해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연극계에서 활약하던 고인은 1947년 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 등에 출연하면서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트로이카로 부상했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를 통해 만난 신상옥 감독(2006년 타계)과 결혼한 뒤 (1955), (1955), (1961), (1963) 등 약 1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또한 1967년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해 교장 겸 이사장을 맡았고, 극단 배우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76년 신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는 1978년 1월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으며,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되면서 두 사람은 1983년 .. 2022. 12. 14.
(영화감독) 신상옥 -평산신씨 해방 이후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빨간마후라」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본명은 신태서(申泰瑞)이다. 학생시절 미술을 전공했다. 경성중학교(鏡城中學校) 2학년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1944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945년 징병을 피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8·15 광복 후 영화감독 최인규 문하에서 일했다. 1949년 독립하여 영화감독 겸 제작자로 활동했다. 데뷔작인 「악야」는 전쟁으로 1952년 개봉되었다. 1954년 「코리아」를 제작하며 알게 된 배우 최은희와 결혼했다. 이후 신상옥프로덕션을 운영하며 「꿈」(1954),「젊은 그들」(1955),「무영탑」(1957),「지옥화」(1958),「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2022. 12. 14.
(사회운동가, 경기 남양주시) 문동환 목사 -모란공원묘지- 문동환(文東煥, 1921년 5월 5일 - 2019년 3월 9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겸 대학 교수였고 미국 피츠버그 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출신이었다. 역시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인 문익환의 동생이다. 1921년(대한민국 3년) 북간도 지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아버지는 간도에서 목회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시인 윤동주와는 한동네에서 자랐다. 어릴 때 ‘동만의 조선족 대통령’으로 불리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을 보면서 목회자가 될 꿈을 키웠다. 룽징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김재준을 만났고, 그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신학교로 유학했다. 그러나 이때는 태평양 전쟁 말기라 학도병 징집의 위험이 있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야 했다. 태평.. 2022. 6. 16.
(소설가) 남촌 정비석[정서죽] 소설가 정비석 1911∼1991. 소설가·친일반민족행위자.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1929년 6월 신의주중학교 재학 중 신의주고등보통학교생도사건으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廣島)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 1932년 중퇴하고 귀국했다. 니혼대학 시절 『프롤레타리아신문』에 단편소설 「조선의 어린이로부터」를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귀국 후 1935년 1월 『매일신보』에 콩트 「여자」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해 7월 『조선문단』에 시 「도회인에게」,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졸곡제」가 가작, 1937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성황당」이 1등으로.. 2017.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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