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반응형

근현대묘44

(희극인) 백남봉 [박두식:본명] 희극인 백남봉 백남봉(白南峰, 본명: 박두식(朴斗植), 1939년 2월 6일 ~ 2010년 7월 29일)은 대한민국의 희극인이다.전라북도 진안 출생이며 1944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 전쟁과 피난을 경험한 그는 한때 고아원에서 자랐다. 구두닦이와 장돌뱅이 등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민의 정을 느낀 그는 1962년 유랑극단을 거쳐 1967년에 물랑루즈쇼단으로 희극인 활동을 시작하여 1969년에 동양방송 라디오 《장기자랑》이란 프로를 통해 방송에 데뷔했다. 이주일과는 TBC 제1기로 동기였다. 성대모사란 특기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석양의 무법자》 휘파람 소리와 각종 동물 울음소리, 뱃고동 소리, 총소리과 말이 달리는 소리 등을 흉내내 큰 인기를 얻었다. 취객·오징.. 2016. 9. 28.
(가수) 최현 가수 최현 1948년 함경북도 성진 출신인 고인은 명지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 미8군 무대를 시작으로 1960년대 말 ‘챠밍가이스’ 등의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후 1970년대 초 밴드 ‘히식스’(He6)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합류해 ‘초원의 빛’을 히트시키며 얼굴을 알렸다. 당시 김홍탁이 이끌던 히파이브는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최헌을 영입해 히식스로 팀 명을 바꿨다. 김홍탁은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안타까웠다. 최헌은 국내에서는 극히 드문 허스키한 탁성을 지닌 보컬이어서 그룹사운드들이 모두 탐냈다.”면서 “현재 히식스 멤버 중 셋은 한국, 둘은 미국에 있는데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인은 김홍탁이 미국으로 건너가며 팀이 해체되자 1974년 새로운 멤버 7명으로 구성된 ‘검은나비’를 .. 2016. 9. 28.
(정치가, 사회운동가) 장준하 -이장 전-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 - 1975년 8월 17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공무원, 언론인, 사회운동가, 잡지발행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자원입대하였으나탈출, 중국군 중앙군 준위를 거쳐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임용되어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2016. 8. 21.
(대한민국 대통령) 제10대 현석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현석 최규하 1919. 7. 16 강원 원주~. 2006. 10. 22 서울 제10대 대통령. 자는 서옥(瑞玉), 호는 현석(玄石). 아버지 양오(養吾)와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효경〉 등을 시작으로 〈소학〉·〈논어〉·〈맹자〉·〈대학〉·〈중용〉·〈통감〉 등을 읽었다고 한다. 1926년 8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한문과 예절을 배우는 가정학습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1932년 4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4학년 때인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세째 딸 홍기(洪基)와 결혼했다.. 2016. 4. 17.
(수경사사령관) 소장 장태완 -국립대전현충원- 수경사사령관 소장 장태완 장태완은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1950년 육군행정종합학교를 11기로 수료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 보병2사단 연대장 등을 거쳐 5군단 작전참모로 월남전에 참여했던 그는 1971년 1월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육군사연구실장(1971),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참모장(1973), 사단장(1975), 육본 교육참모차장(1978) 등 여러 보직을 역임했다. 1979년 가을, 그는 수경사사령관(소장)에 취임했으나 불과 1개월 뒤 운명의 12·12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반란 진압 노력은 수경사 예하 연대장들이 잇따라 신군부 측에 가담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고, 그 역시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었다. 1979년 12월 13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간 그는 1.. 2016. 4. 17.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 -국립대전현충원-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 고향에서 증조부와 조부모, 부모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광진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47년 7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낸 후 1950년 6·25전쟁 개전 직후 대대장에 보직되어 1951년 9월까지 기계-안강전투, 영천회전, 원산전투, 영흥-함흥-성진진격전투, 현리지구 철수전투 등 각종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사단 작전참모,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교관 등을 거쳐 1956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을 지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사단장과 함께 혁명을 지지하였다. 이후 2군 작전처장을 거쳐 그해 8월에 준장으.. 2016. 4. 17.
(독립운동가) 김봉성 -망우리공원묘지- 독립운동가 김봉성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선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였던 이승훈(李昇薰)이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였던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부탁하며 추진되었다. 홍성익은 동료 교사인 김지웅(金志雄) 등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성학교 내의 업무는 김지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맡겼다. 당시 신성학교 4년생이던 그는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3.. 2016. 1. 22.
(대중가수) 배호 [배신웅] 대중가수 배호 1942. 4. 24 중국 산둥 성[山東 省]~ 1971. 11. 7 서울. 본명은 배신웅(裵信雄). 광복군 제3지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배국민과 어머니 김금순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살다가 1955년 아버지가 죽자 부산으로 내려가 이모가 운영하는 모자원에서 생활하면서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를 수료했다. 1956년 8월 음악을 하기 위해 혼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광빈에게 드럼을 배운 지 1년 만에 통달하고, 김광빈악단에서 드럼 연주를 하였다. 1963년 김광빈 악단 및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 예명을 배호로 하고, 김광빈이 작곡하고 편곡한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을 발표하며 가수로 .. 2012. 11. 11.
(대중가수) 차중락 대중가수 차중락 차중락 (車重樂, 1941~1968.11.10 ) 요절가수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될 만큼 건장한 몸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박은 뛰어난 모창으로 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는 '코리언 엘비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의 정서를 적절하게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던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서울 신당동 토박이로 전문학교 마라톤선수 출신으로 토건업과 인쇄소를 경영했던 부친 차준달과 경기여고 단거리선수 출신인 모친 안소순의 8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중락과 함께 11명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아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첫째는 역도선수, 둘째는 경복고 밴드반장과 연대.. 2012. 11. 4.
(소설가) 김말봉 소설가 김말봉 김말봉 ( 金末峰, 1901. 4. 3~1961. 2. 9 ) 여류소설가. 본명은 말봉(末鳳)이다. 부산출생.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경도(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까지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기자로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 亡命女〉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 됨 으로써 문단에 .. 2012. 11. 3.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