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
고향에서 증조부와 조부모, 부모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광진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47년 7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낸 후 1950년 6·25전쟁 개전 직후 대대장에 보직되어 1951년 9월까지 기계-안강전투, 영천회전, 원산전투, 영흥-함흥-성진진격전투, 현리지구 철수전투 등 각종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사단 작전참모,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교관 등을 거쳐 1956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을 지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사단장과 함께 혁명을 지지하였다. 이후 2군 작전처장을 거쳐 그해 8월에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1962년 7월부터 방첩부대장을 지냈다. 1963년 민정 이양 선거 당시 군의 부정선거를 철저히 감시하여 군내에 야당후보의 득표가 높아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듣기도 하였다. 1965년 7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불편한 관계로 예편의 위기에 몰렸으나, 1966년 말 육군참모총장이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교체되자 소장으로 진급하여 국방부 인사국장을 지냈다. 이때 불교신자 장병들을 위한 군승(軍僧) 제도를 도입하였고, 육군종합행정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학교장을 지냈다. 이후 제1야전군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을 거쳐, 1973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3군단장을 지내고 1975년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사관학교 졸업 후 5년 근무한 장교를 행정부 사무관으로 특별 채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77년 12월에 제1야전군사령관이 되어 1978년 5월에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79년 2월에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육군의 인재 육성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26사건)이 발생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12월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하극상 사건(12·12사건)에 의해 날조된 죄목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전역을 당했다. 1981년 3월에 사면 복권되었고, 1997년에 재심판결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고 계급과 명예가 회복되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총재인 김영삼 후보를 돕기 위해 잠시 당 고문을 맡기도 하였으나, 김영삼 총재의 국회위원 전국구 1번 제의를 사양했다. 1999년 12월 성우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200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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