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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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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묘14

(고려문신) 재지 최재 [문정공] -전주최씨 고려 후기에, 감찰대부, 전리판서, 개성윤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재지(宰之). 선부전서(選部典書)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1321년(충숙왕 8)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로 출발, 산원(散員)·별장(別將)을 거쳐 133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 복위 연간에 중부령(中部令)과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지내고, 충목왕 즉위 초에는 전법정랑(典法正郎)을 거쳐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외보(外補)되어 백성을 잘 다스렸으나, 권신 인승단(印承旦)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권문세가의 토지·노비 등의 부당한 탈점을 정리할 때 판관(判官)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전객부령(典客副令)·자섬사사(資.. 2024. 4. 22.
(고려 문관) 인헌공 강감찬 -금천강씨, 귀주대첩- 고려 전기에,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 승지(承旨)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중추원사(中樞院使) ·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2023. 11. 20.
(고려무신) 철원부원군 무민공 최영, 삼한국대부인 문화류씨 -동주최씨-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아버지는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이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 염흥방을 .. 2023. 2. 12.
(문신, 경남 남해군, 경상남도 기념물 제155호) 이재 백이정 - 남포백씨, 傳 백이정 묘- 고려 후기의 유학자인 이재(彛齋) 백이정(1247∼1323)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를 겸하였고 뒤에 상당군에 봉해졌다.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에 가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10년 동안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켰다. 그의 문인으로는 이제현, 박충좌, 이곡, 이인복, 백문보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하여 확립한 사람은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평산리 망기산의 우지막골은 수백년간 ‘백정승의 묘’라고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긴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 2022. 9. 15.
(문신) 종정공 권사종, 국대부인 벽진이씨 -안동권씨- 판종정시사 권사종 정3품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종정시사(判宗正寺事)에 이르렀고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공조전서를 지낸 판사공(判事公) 집중(執中)이고 차자는 우왕 6년 병과 급제하여 상주목사를 지낸 집경(執經), 삼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낸 예빈공(禮賓公) 집지(執智), 4자는 영남 서부일대에 세거하는 계파조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낸 감정공(監正公) 집덕(執德)과 2녀가 있다. 장녀는 해평인 판밀직사사 윤가관이며, 차녀는 해주인 판예의사사 정윤규의 아들인 좌찬성 대제학 정도공 정역이시다. 2020. 12. 26.
(고려문신) 백운거사 문순공 이규보 -여주이씨- 백운거사 문순공 이규보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불렸다.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과거지문(科擧之文)을 하찮게 여기고 강좌칠현(姜左七賢)의 시회에 드나들었다. 이로 인해 16, 18, 20세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했다. 2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런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했다. 26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 2016. 7. 10.
(고려무신) 위열공 김취려 -언양김씨- 위열공 김취려 김취려(金就礪) ?~1234(고종21) 고려의 장군(將軍), 예부 시랑(禮部侍郞) 부(富)의 아들. 음관(蔭官)으로서 정위(正尉)에 임명된 뒤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將軍)으로 동북계(東北界)를 진압한 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216년(고종 3) 거란병(契丹兵)이 가족들을 이끌고 의주(義州)·영주(寧州)·삭주(朔州) 등지에 쳐들어와 식량을 약탈하고 그곳을 생활 근거지로 삼으려 하자 후군 병마사(後軍兵馬使)로 그들을 크게 물리쳐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고, 이듬해 다시 전군 병마사(前軍兵馬使)가 되어 충청도 제천(堤川)에까지 침입한 거란병을 크게 무찔러 격퇴했다. 1218년(고종 5) 그들이 다시 침입하자 병마사(兵馬使)가 되고 원수 조충(趙퀖)과 함께 이를 격퇴, 이듬.. 2016. 7. 10.
(구안동김씨 중시조) 상락군 본연 김방경 [충렬공] -구안동김씨- 상락군 충렬공 김방경 김방경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서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했고, 원의 일본 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김방경은 첫 부인으로 박익정(朴益旌)의 딸을 맞이하였다. 기거랑지제고중서사인을 지낸 박익정은 무인 집권기에 고급 관인을 배출하여 세족으로 성장한 죽산박씨(竹山朴氏)의 후예였고, 인천이씨 이장용(李藏用)과는 사돈관계였다. 박씨는 3남 3녀를 두고 김방경에 앞서 사망하였다. 박익정의 장남 박휘(朴暉)가 이장용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의 처남(박휘)의 장인이 이장용이었다. 김방경은 재취로 손씨를 맞아 1녀를 두었으나 손씨에 관한 자료는 발.. 2015. 3. 7.
(문신) 익양부원군 정몽주 [문충공], 경순택주 경주이씨 -연일정씨- 익양부원군 문충공 정몽주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때의 충신이자 학자. 호는 포은. 초명 몽란· 몽룡이었고, 시호는 문충이다. 고려 삼은 중의 한사람. 영천에서 태어나 1357년(공민왕 6년)에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 등 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24세 때 3번의 과거에 연달아 장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 라게 하였다. 1377년에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잦은 침략에 항의하고, 그 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의 백성 수백 명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1383년에는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무찌르고, 이듬해 명나라에 가서 조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조공을 면제받고 명나라와 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 다. 또한 의창을 세워.. 2014. 11. 23.
(안동장씨 시조) 안동장씨 시조 태사공 장정필 안동장씨 시조 태사공 장정필 안동 장씨 시조 태사 장정필은 888년 신라 진성여왕 떄 중국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 장군인 장 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장길이다. 그가 5살 되던 892년(신라 진성여왕4년) 에 중국의 정치가 문란하자 어지러운 난국을 피해 아버지가 신라에 망명 할 때에 따라 들어와서 강릉에 살다가 경북 인동(구미시)에서 남쪽으로 10여리에 있는 노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후 18세에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가 24세때 문과에 장원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 까지 알려져서 벼슬이 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신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 201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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