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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묘

(고려 문관) 인헌공 강감찬 -금천강씨, 귀주대첩-

by 보현당 2023.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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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에,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 승지(承旨)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중추원사(中樞院使) ·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9) 경관직(京官職)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外官職)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고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 해에 거란의 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上元帥大將軍)이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이때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 현재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현재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특히 구주(龜州)에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거란군은 애초 10만의 병력 가운데 고작 수천에 불과한 인원들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의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강감찬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또한 강감찬는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해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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