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수 차중락
차중락 (車重樂, 1941~1968.11.10 ) 요절가수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될 만큼 건장한 몸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박은 뛰어난 모창으로 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는 '코리언 엘비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의 정서를 적절하게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던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서울 신당동 토박이로 전문학교 마라톤선수 출신으로 토건업과 인쇄소를 경영했던 부친 차준달과 경기여고 단거리선수 출신인 모친 안소순의 8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중락과 함께 11명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아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첫째는 역도선수, 둘째는 경복고 밴드반장과 연대 야구부 주장을 맡았던 재주꾼이었고 넷째인 중광은 성균관대 야구부 투수이자 그룹 다크 헤어즈의 보컬이었다. 다섯째 중용은 양정고의 마라톤선수이자 그룹 가이스&돌스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직업가수로 형제들 중 차중락과 외모와 목소리가 가장 흡사해 대역으로도 활동했을 정도였다. 낭만적이고 유순한 성품의 셋째 차중락은 경복고시절 음악보다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진학한 한양대 연극영화과 신입생 시절에는 극장을 안방 드나들 듯했다. 영화마니아였던 그가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의 음악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심취하면서부터이다. 좋아했던 가수는 폴 앵카와 엘비스 프레슬리. 가끔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반응도 좋았다. 동경에서 팝가수로 활약하다 돌아와 미8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손목인의 큰 아들 후랭키 손은 차중락의 천재적인 엘비스 모창에 흠뻑 반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무대에 설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권고로 차중락은 일본에서 노래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 수업을 받아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63년 학교까지 중퇴하고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63년 10월 사촌형인 차도균의 권유로 그룹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의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인 시민회관 공연은 큰 화젯거리였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때쯤 차중락은 수년간 사귀어오던 이대생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신세기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 역시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신세기.66년11월10일>을 엘비스의 히트곡 를 편곡해 동병상련의 차중락에게 선사했다. 당시는 반주음악 완성 후 가수가 노래를 불러 녹음을 완성하던 때. 그룹 키보이스는 반주음악의 템포와 필링을 함께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계절의 분위기와도 맞아 떨어져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차중락에게는 집요한 솔로 독립 유혹이 거셌다. 이때가 67년. 솔로 독립 후 차중락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콜라를 두병이나 마셔야 겨우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는 눈코뜰새없는 생활의 연속이였다. 당시 그의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호로, 좋은 친구사이였던 차중락과 배호는 가요황금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그룹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들의 사랑을,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인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솔로 독립 후 최대 히트곡은 TBC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던 <사랑의 종말-신세기. 1967년>이다. 이곡은 TBC 방송가요 대상 남자 신인가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명곡으로 꼽힌다. 그러나 차중락 개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이었다. 잘생긴 외모, 건장한 체구,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성품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추어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27세의 건장했던 젊은 가수도 인기라는 족쇄에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연예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차중락은 결국 서울 동일극장 무대위에서 고열로 쓰러진 후 1968년 10월 11일 자신의 대표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발표 1주년 날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가수생활동안 겨우 20여곡만을 남겼지만 가을과 낙엽의 계절을 대표하는 명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채 낙엽을 사랑하는 가을연인들을 위해 올해도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차중락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양지바른 곳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1969년 2월 11일 건립된 추도비에는 조병화 詩 「낙엽의 뜻」이 기념사업회 명의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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