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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최희순] -양천최씨-

by 보현당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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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장,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 등을 역임한 학자. 미술사학자. 본관은 양천(). 본명은 희순()이며 순우()는 필명이다. 호는 혜곡(). 종성()의 아들이다. 고유섭()의 감화로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미술과장·수석학예연구관·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직하여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마쳤다.

6·25사변 중에는 생명을 내걸고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였다. 1950년대 초반 서울 환도 등 혼란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세 번이나 이전, 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순직하였다.

1962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목기·회화 전시를 비롯하여 ‘한국미술2천년 전시’ 등 대소 규모의 특별 전시를 수십 차례나 주관하여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국외에서도 1950년∼1961년 사이 한국 미술의 미국·유럽 전시와 1976년∼1984년 사이 ‘한국미술5천년’의 일본·미국·유럽 전시의 주역으로 한국 미술 문화를 세계에 크게 선양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한국·동양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

1945년부터 5년간 문학 동인지 『순수()』의 주간도 맡은 바 있는 그는 한국 미술에 대한 주옥같은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의 감식안은 당대 제일로 고미술계가 혼란한 중에서도 옥석을 가리고 자신 있게 정론을 폈다. 그의 지론은 한국 미술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우며 미술품에 잔재주를 부리면 한국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위원회 위원(1967년∼1984년), 한국미술평론인회 대표(1962년∼19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1965년∼1966년),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1976년∼1980년)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미술 연구와 문화재 보존에 깊고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에게는 방대한 저서·논문보다는 국민을 폭넓게 이해시키기 위한 수많은 수필·논고가 있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최순우전집』(전 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순우 [崔淳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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