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순국선열및 호국영령묘

(대한민국 군인, 1212사태) 중령 김오랑

by 보현당 2024. 2. 5.
반응형

19444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김해시 삼정동) 119번지에서 아버지 김종수와 어머니 임순이 사이에서 4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57년 김해 소재 삼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또래보다 1년 늦게 김해중학교(10)에 입학했으며 김해중학교를 졸업하고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했으나 학비 문제로 인해 등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5년에야 육군사관학교(25)에 입교했다. 육사 동기로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황진하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69년에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첫 부임하게 되었다. 중위 진급 후 19707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왔고 이듬해인 197110월에 귀국했다. 1972년에는 육군3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충남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에 부임했고 1974년에는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육군특수전사령부(이하 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작전장교, 정보장교, 사령관 전속부관 등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38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 과정에 입교했고 육군대학 졸업 후에는 소령으로 진급해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진급이 유리한 야전부대나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에게 심각한 시력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서울 인근에 계속 머물고자 했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받았으나 불과 한 달 만인 19793월에 특수전사령부 행정장교로 발령받아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자력을 보면 엘리트 장교였음을 알 수 있다. 3, 학군단 교관 보직이나 당시 주요 부대였던 특전사의 참모처 보직 모두 좋은 자리이고 특히 사령관 전속부관과 비서실장을 맡아 사령관을 지근거리에서 2차례나 수행했는데 이는 당연히 군내에서 인정받는 장교였음을 방증한다. 어느 조직이나 고위직 수행원은 아무나 시키지 않고 현재도 전속부관/비서실장은 엘리트 장교의 상징이다.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와 육군특수전사령부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는데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제압을 포함한 지휘부 무력화를 위해 동원되었다. 이날 저녁, 김오랑 소령은 아내 백영옥에게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라는 마지막 전화를 남겼고 백영옥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한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고 한다. 1213일 새벽 제3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세창 여단장은 곧 박종규 중령 부대병력을 동원해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했다. 당시엔 이미 국방부하고 육군본부가 1공수에게 점령당하는 등 진압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였고, 특전사에 있는 대부분의 군인들이 신군부의 회유에 넘어간 상태였지만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한 후 혼자서 권총을 장전하고 사령관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으며 약 10분 뒤 평소 친분이 깊던 박종규 중령의 반란 특전사 부대가 사령관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김오랑 소령은 교전 중반란군에게 가슴과 배 등에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사건 발생 직후 특전사령부 뒷산에 가매장되었으나 사건 다음날인 1213일 후임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한 정호용의 지시로 부대장이 거행되고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로 옮겨졌다. 당시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이었던 김충립의 증언에 의하면 당초 반란을 주도한 보안사령부 측에서는 시신을 조용히 가족에게 인계하고 더 이상의 예우(부대장 또는 국립묘지 안장)는 절대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하지만 대구의 제5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있던 바람에 군사반란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신임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총격전의 전말을 보고 받은 뒤 "부대 내에서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 것은 잘못된 일이고, 김오랑은 목숨을 바쳐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훌륭한 군인이며 부당하게 피살당했기에 부대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듣고 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 등은 격노했으나 정호용은 전두환과 노태우와 절친한 육군사관학교-하나회 동기였기 때문에 끝내 그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