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의 병장.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초병으로 근무하던 중 국방부에 진입하려던 반란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국방부를 지키다 전사한 유일한 희생자였으며, 사태 전체로 확대해 봐도 김오랑 중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 함께 반란 진압 중 전사한 유이한 인물이다. 전역이 3개월 가량 남았던 1979년 12월 13일 전두환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으로 '진도개 하나'가 발령되자 국방부에서 근무 중이던 군인들은 모두 경계근무에 배치되었다. 그의 선임은 전역을 앞둔 그를 배려해 보안실에 그를 배치하려고 했지만 그는 요충지인 B2 벙커에 후임 일병이 배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벙커 초병을 자원했다고 한다. 당시 50헌병중대 행정병 출신에 따르면 B2 벙커에서의 근무가 어려울 것임을 우려한 그가 후임을 보안실로 보내고 본인이 B2 벙커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B2 벙커 출입구 외곽의 초소를 점령한 반란군 제1공수특전여단은 벙커를 점령하기 위해 5~6명의 공수부대원을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보냈고 이때 반란군의 총성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오던 그와 마주쳤다. 당시 지하 벙커로 내려오던 공수부대원을 보고 숨어서 이 대치를 목격한 한 방위병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이 정선엽에게 총을 건네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우리 중대장님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8]고 외치며 끝까지 저항했고 공수부대원과 격한 몸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몸싸움을 하다가 그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결국 그와 몸싸움을 하던 반란군 측 대위가 그의 목에 권총을 발포하고 말았다. 뒤이어 시작된 공수부대원들의 사격에 그는 목에서 머리를 관통한 1발, 가슴 부위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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