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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애순 -대전현충원, 김규식 배위-

by 보현당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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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황해도 장연 출신. 아버지는 김성섬(金聖蟾), 어머니는 안성은(安聖恩)이다. 송천학교를 마치고 상경,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학생들에게 우리 나라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쳤다. 이 일로 여러 번 단속을 당하고, 붙잡힐 기미가 보이자 1911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남경에서 중화명덕여자학원(中華明德女子學院)을 다녔다. 1919년 1월에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고 상해로 이주, 김규식·신석우(申錫雨)·선우혁(鮮于爀)·장덕수(張德秀)·여운형(呂運亨) 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 국내와 만주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흑룡강 국립여자사범학교 학감도 지냈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대한적십자회 이사로 취임하고 다음 해에 부속간호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1월에 역시 상해에서 손정도(孫貞道)·김철(金徹)·김립(金立)·윤현진(尹顯振)·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한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며 일본 정부대신 및 친일 한국인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의용단(大義勇團, 또는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에는 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934년에는 상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43년 2월에는 충칭[重慶]에 있는 각계 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재건대회를 개최하여 주석으로 선출되고,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해 분투하자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해에 영국과 미국의 원수가 워싱턴회담에서 전후 한국을 독립시키기 전에 국제감시보호하에 두기로 하였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었다.

이에 분노해, 같은 해 5월 중국에 있는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무정부주의연맹·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주석단(主席團)의 일원으로 선출된 뒤, 한국은 완전 독립되어야 하며 전후에 어떠한 국가의 공동관리나 보호도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8년 평이사로 있다가 1962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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