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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묵재 허적 [숙헌공], 정경부인 광주이씨, 정경부인 여흥민씨 - 탁남

by 보현당 201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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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헌공 묵재 허적

 

1610(광해군 2)~ 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남인으로 제1·2차 예송에서 서인과 대결했으며,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뒤 탁남(濁南)의 영수가 되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 아버지는 부사 한(僩)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했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647년 일본의 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을 둘러싸고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에 맞서, 허목(許穆)·윤휴(尹鑴) 등과 함께 3년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뒤 호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4년 우의정이 되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68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송시열의 논척(論斥)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이 득세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수립했다. 그뒤 남인은 송시열 등의 처벌문제로 청남(淸南)과 탁남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어 허목 등의 청남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1676년(숙종 2)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가 되었다. 1678년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사용하도록 했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함부로 사용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같은해 서인인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이 그의 서자 견(堅)이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형제와 함께 역모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윤휴 등과 함께 사사(賜死)되었으며,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했다(경신대출척).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 등을 죽이고, 그의 관작을 추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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