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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신라왕릉,경주오릉1) 제 1대 傳 혁거세거서간 -사적 제172호, 삼국사기-

by 보현당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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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조  혁거세 거서

 

 

오늘은 저번에 올린 혁거세거서간의 릉을 삼국유사의 내용인 오체에 관한 내용을 근거로 해서 올렸습니다.  오늘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내용입니다.  논문을 통해서 만난 신라 왕릉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비정 과정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과 연구의 한계가 있다는 점과 그것으로 인해 정말 누구의 능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게 다가옵니다. 저 또신라왕릉을 공부할 수 있는 방법도 기존의 학자들께서 발표하신 논문을 통해 공감하고 반문하고 하였답니다.

오늘은 오릉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근거로 내용을 담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보현당의 개인 사견이며, 잘 못되었다면 확실한 근거자료를 저에게 보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조선시대 박효민공께서는 저와 같은 고민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모든 학자분들께서 하셨고 후손들께서 하셨던 고민은 듯합니다. 


 오릉에 있는 능 비정은 큰 봉분은 대체적으로 혁거세거서간의 능으로 비정하는 듯합니다. 그 뒤에 있는 3호분을 알영부인의 릉이라고 하는데 비공식적으로 비정하는 듯합니다. 나모지 땅콩같이 생각 2호분과 4호분 그리고 5호분을 어떤 능이 남해차차웅이고 유리이사금이고 파사이사금인지 비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체적으로 말씀들은 하지 않으시지만 2호분을 남해차차웅으로 4호분을 유리이사금으로 5호분을 파사이사금의 능으로 비정하지만 이건 어디 기록에도 없이 그냥 제가 감히 비정하였습니다.  어떠한 근거 자료가 없이 보현당 개인의 사견임을 밝혀 둡니다. 

 

1. 혁거세거서간

 

- 삼국사기내용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 기원전 570415)

시조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4월 병진(丙辰) 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 에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육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어, 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인(辰人)은 박[()]를 박()이라 했고 처음에 [혁거세가 태어났던] 큰 알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박()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은 진()[()] 사람들의 말로 왕을 가리킨다.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校勘 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校勘 歳,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辰言王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 403() )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虵校勘 陵, 在曇校勘 巖寺北.

 

- 삼국유사내용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국인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5(五體)5(五陵)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理國六十一年王升于天, 七日後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有大虵逐禁, 各葬五體爲五陵亦名虵陵, 曇嚴寺北陵是也. 太校勘 子南解王継位.

 

 

 

 

 

 

 

 

 

 

 

 

 

 

 

 

 

신라의 건국시조[생몰년: 서기전 69∼서기 4(혁거세거서간 61), 재위: 서기전 57∼서기 4]. 신라 박씨()의 시조이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로 지칭한다. 사로 6촌장() 세력을 규합하여 사로국()을 세웠으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신화()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 6촌()의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였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때 양산() 밑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이 하늘로 날아가자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런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과 같아 성을 박()이라 하였다. 또한, 그 광채로 인해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라고 하였다. 고허촌() 촌장인 소벌공(: )이 데리고 가서 길렀다.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존경하였다. 나이 13세가 되자 이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 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라 하였다. 또한, 나라이름을 서나벌()·서라벌()·서벌() 혹은 사라()·사로()라 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3년(혁거세거서간 5) 알영()을 비()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신화는 성읍국가()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이전에 나뉘어 살았던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 세력을 압도한 유이민() 박씨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박씨 집단은 말〔〕및 천신하강()의 모티브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 서기전 57)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삼국사기』가 신라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가 참위설()의 갑자혁명설()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서기전 37년 경주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다. 또한, 서기전 32년에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다. 그러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자, 그 해에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 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 승하한 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제사지() 신라조()에 따르면, 남해왕(: ) 3년에 세운 시조묘()의 주신()은 혁거세이고, 사시()에 제사하였으며, 남해왕의 누이인 아로()가 제사를 맡았다. 시조묘 제사는 왕이 즉위한 해나 다음 해의 정월()이나 2월에 왕의 친사()로 거행되었고, 또 유사시에 거행되기도 하였다. 시조묘 제사의 대상 신인 혁거세는 왕실의 시조왕이자 나아가 신라 지역 전체의 관념적 시조신이었다. 이에 박·석·김의 3성()이 교립()하던 신라 상고기()는 물론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혁거세가 시조묘 제사의 제사대상이 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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