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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1] 감문국 - 영남일보

by 보현당 2016.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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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1] 감문국

감문국은 김천 역사·문화의 시발점이었다
삼국사기서 기록 처음 발견,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
왕릉·토성 등 곳곳에 흔적, 박물관·안내판 등 마련해야
김진욱기자  2007-03-22 07:16:43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다. 패자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 위에 가려져 있다. 삼국시대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신라는 수많은 소국(小國)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해 갔다. 신라의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 있고 신라의 문화유적은 보존돼 있지만, 신라에 복속된 이들 소국의 역사와 문화유적은 잊혀 가고 있다. 

그러나 올해들어 영천시를 중심으로 경북지역 8개 자치단체와 향토 사학자들이 이들 소국을 재조명하고, 이들의 유적지를 복원해 관광자원화하려 하고 있다. 영남일보는 이들 자치단체와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모두 9회에 걸쳐 이들 소국의 흔적을 찾아간다.  <편집자 주> 

감문국 궁궐연못으로 전해지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동부연당.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이 연못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천시내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감천이다. 김천시 개령면에는 해발 239m의 낮은 산이 있다. 김천 시민들도 잘 모르지만 그 산의 이름은 감문산이다. 또 김천의 면 이름 중에는 감문면도 있다. 이들 이름에서부터 1천800여년 전 김천에 있었던 '감문국(甘文國)'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김천을 대표하는 농악은 빗대농악이다. 빗대농악이 감문국시대에 군사들이 진영을 펼치고 조련하는 장면과 전쟁에 출전하거나 개선할 때 군사들을 위로하던 연회의 성격이 담긴 굿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빗대농악 역시 감문국의 흔적인 것이다. 

김천에는 한국도로공사 등 13개의 공기업이 입주하는 경북혁신도시가 들어선다. 신도시가 조성돼 김천 경제에 크게 기여할 것이란 기대감이 김천시민들에게 만연해 있다. 새로운 도시 조성을 준비하는 김천이지만 1천800여년 전 김천의 모습, 감문국의 흔적을 복원하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 기록 속의 감문국= 감문국이 신라에 의해 231년 멸망됐다는 기록은 있지만,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에도 없다.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우리 역사서는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신라 조분왕 2년(231) 7월,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감문국을 토벌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감문국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 감문국 전문가인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기원전 2~3세기에 건국돼 300~500년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이래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고지도와 지리지 등에 감문국과 관련된 사료들이 등장한다. 이런 역사서를 근거로 역사학자들은 감문국의 중심지를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감문국의 세력이 감문면과 아포읍, 김천시내에까지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선산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감문국은 어느 정도 컸을까. 이근구 김천향토사연구회장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삼한의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수천호라고 했고, 서거정의 동국통감에는 큰 나라는 4천~5천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라고 했다"며 "감문국을 작은 나라로 볼 때, 인구는 4천여명일 것"이라고 했다. 

◆ 감문국의 흔적=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에 비교적 큰 무덤이 하나 있다. 높이 5m, 지름 10m 크기의 이 무덤을 이 동네 주민들은 '말무덤'이라고 불렀다. 주민들은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컸는데, 관리를 하지 않아 작아졌다고도 했다. 일제시대때 도굴됐다는 얘기도 있다고 했다. 

'말무덤'의 '말'은 '크다'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로 말무덤은 '큰 무덤', 즉 수장의 무덤이다. 이 무덤을 학계에서는 '금효왕릉'이라 부른다.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감문국 멸망 이후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금효왕릉의 봉분이 높고, 봉분을 높게 하는 방식은 5세기 이후 등장했기 때문에 금효왕릉 조성시기가 감문국 멸망 이후라는 것이다. 이는 감문국이 신라에 의해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기간 토착세력에 의한 지배를 신라가 용인했다는 증거라고도 한다. 

김천시 개령면 감문산의 정상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뚜렷한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길이 200m, 높이 2.5m, 성폭 10m 의 감문산성은 신라에 복속된 감문국 시대의 토성이라고 향토 사학계는 밝히고 있다. 

감문산은 성황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으로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취적봉 혹은 봉수산이라고도 불리는 바, 이는 나라에 변란이 생겼을 때 산 정상에서 피리를 불거나 봉홧불을 올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봉수대의 흔적은 남아 있다. 

감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의 속문산 해발 600m 지점에 석성과 토성이 함께 축조돼 있다.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고소산(해발 365m) 정상 50여m 전에도 남북으로 700여m에 달하는 석성이 남아 있다. 석성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김천에는 감문국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9개의 산성이 있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의 동부연당은 감문국 때의 궁궐연못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감문면과 개령면 일대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무덤인 지석묘와 토광묘, 석곽묘 등 크고 작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특히 감문면 문무리 마을 주변과 야산에는 수십기의 지석묘와 석실분이 있어, 당시 공동묘지로 추정된다. 이석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면과 개령면 일대를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 김천의 역사와 문화의 시발점임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개령면 신룡리와 대광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의 이름은 애인고개다. 감문국과 신라가 대치할 당시 신라 총각과 감문국 공주가 사랑에 빠졌으나, 양국의 대치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공주가 상사병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개령면 신룡리의 '나벌들'은 감문국시대 나(羅)씨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큰 공을 세웠다고 붙여진 지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처럼 김천에는 감문국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감문국의 흔적임을 알려주는 안내판도 없는 상태다. 이근구 김천향토사연구회장은 "김천에서 발굴된 역사문화유적이 많지만 이를 보관하고 전시할 박물관이 없다. 박물관 건립이 시급하다"면서 "당장 박물관 건립이 어렵다면 역사문화유적에 안내판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기획:영남일보·영천시·경북고도읍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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