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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묘

(문신) 운포 정혜공 여성제, 정경부인 금천강씨 -금천강씨-

by 보현당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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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인조 3)∼1691(숙종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 관찰사 우길(祐吉)의 손자이며, 부사 이량(爾亮)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참판 이징(爾徵)의 양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으로 그 영향을 받았고, 인조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아버지 한준겸의 외손자로서 국척관계(國戚關係)에 있었다. 1650년(효종 1)생원시에 장원하고 1654년 참봉에 배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같은해 가을에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이후 북평사(北評使)·집의·동부승지 등을 거쳐 호남을 안찰(按察)하여 유업(儒業)과 무예에 치적이 많았다. 외직에서 돌아와 호조참의·대사간·좌부승지 등을 거쳐, 북도(北道)를 안찰하였고, 1678년(숙종 4)강릉부사에서 예조판서로 특진, 발탁되었다. 1680년 조정의 보사공신(保社功臣) 추록(追錄)시에 그는 공정하지 못한 공신추록은 여론의 의혹을 더욱 살 것이며, 이사명(李師命)·신범화(申範華) 등의 봉군(封君)을 환수하고 김석익(金錫翼)의 가자(加資)도 개정하여야 한다고 반대상소를 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되었다.
이듬해 앞서 현종의 국상(國喪)때 도감(都監)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좌찬성을 역임한 뒤 1684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정가에서 분경(奔競)과 뇌물이 심하자 이를 근절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688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해에 왕이 동평군(東平君)을 지나치게 총애하자 박세채(朴世采)가 간한 데 이어, 남구만(南九萬)이 이를 또 간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구해(救解)하려다가 또한 경원으로 정배되었다. 그뒤 곧 용서되어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1689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소론인 그는 당시 집권층인 남인과의 의견충돌로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이때 남인들이 성혼(成渾)·이이(李珥)를 문묘에서 출향(黜享)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진소(陳疏)하였고 앞서 성혼·이이의 배향시에 춘관(春官)으로 관계관이었다고 하여서 청죄(聽罪)당하여 양강(楊江)으로 해귀되었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때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은 극간하다가 죽고 그와 이상진(李尙眞)만이 끝내 상소하였으나 허사가 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울분으로 1691년 8월에 죽었다. 저서로는 《운포집》이 있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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