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대사헌, 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감찰 심금(沈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천부사 심종침(沈宗忱)이고, 아버지는 감찰 심설(沈偰)이다. 어머니는 청원도정(靑原都正) 이간(李侃)의 딸이다. 1620년(광해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족조(族祖)인 심종도(沈宗道)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檢閱)에 등용된 뒤 저작(著作)·겸설서(兼說書)·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교리·헌납(獻納)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 말과 사람을 매매함)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 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應敎)·집의(執義)·교리·부수찬(副修撰)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윤계가 죽어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했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그러나 1643년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 초에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아들 심익현(沈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했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다.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 왕이 병이 들거나 사후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이 맡는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 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쫓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 억울함을 펴도록 구원함)하기도 하였다. 심지원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한 점,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한 점,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 『만사고(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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