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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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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7

(선조) 정근옹주, 일선위 김극빈 -선산김씨- 정근옹주, 일선위 김극빈 정근옹주(貞謹翁主, ?~1613)는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아홉번째 딸로 선조와 그의 후궁인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김이원(金履元)의 아들인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남편의 묘와 동-서로 나란히 하여 동향하여 있는데 우선 상부의 묘는 장방형 화강암 석재 9매를 이용하여 호석을 둘렀다. 아래의 묘도 장방형 화감암 8매를 원형으로 둘렀다. 묘 우측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좌가 있다. 묘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있다. 2019. 3. 19.
(선조) 정안옹주, 금양위 분서 박미 -반남박씨- 정안옹주, 금양위 분서 박미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참찬 동량(東亮)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1603년(선조 36)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유15)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2016. 7. 7.
(조선) 인성군 이공 [효민공], 해평군부인 해평윤씨 -전주이씨- 효민공 인성군 이공 휘는 공(珙), 호는 백인당(百忍堂), 시호는 효민(孝愍). 선조대왕의 7남으로서 정빈 민씨 소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선조대왕이 몹시 사랑했었다. 학업은 일취월장했고, 필법은 달관,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의 책임을 겸했는데 사무 처리가 너그럽고 엄하며 공명정대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또한 호령을 한번 내리면 모두들 두려워 했으며 광해군이 날로 꺼려했고 이이첨 등은 공의 인망을 시기하여 사형수에게 무고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궐하에 석고대죄하고 죄를 기다린지 수 일만에 울분으로 병이 나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 2016. 4. 24.
(선조) 정빈 여흥민씨 정빈여흥민씨 정빈 민씨(靜嬪 閔氏, 1567년 ~ 1626년)은 선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여흥이다. 강화 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딸로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의 증손녀이다. 1580년(선조 13년) 음력 5월 26일 종2품 숙의(淑儀)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이때 간원이 민씨의 출신이 성종의 외손 집안이니 선발에서 제외하라고 간하였지만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홍여겸(洪汝謙)의 딸(훗날의 정빈 홍씨), 정순희(鄭純禧)의 딸과 함께 숙의가 되어 입궁하였으며 민씨는 수진방(水眞坊)에 있는 궁으로 옮겨졌다. 이후 소의, 귀인을 거쳐 정1품 빈(嬪)에 봉해졌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인성군 외에 딸 셋과 아들 둘을 낳았다. 인성군은 1624년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1626년 정빈 민씨.. 2016. 4. 24.
(14) 목릉(穆陵) - 선조(宣祖), 의인왕후(懿仁王后) 반남박씨 목릉(穆陵) 선조(宣祖), 의인왕후(懿仁王后) 반남박씨 - 재위기간 : 1567년 ∼1608년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선왕 명종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해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황, 이이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 2015. 9. 5.
(선조) 영창대군 이의 영창대군 이의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1614년)은 선조의 아들로, 인목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의(㼁)이다. 선조의 영창대군은 유일한 적자이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의정(領議政) 유영경(柳永慶) 이하 몇몇 신하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몰래 의논하였다. 이 눈치를 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선조의 비위를 거슬러 무근한 소리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 떠나는 것을 차일피일하던 차에 갑자기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당일로 왕위에 올라 이들도 다시 불러 등용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에 영창대군에 책봉되었다. 앞서 선조가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으려던 일 때문에 영창대군을 둘러싼 갈등이.. 2015. 6. 7.
(14) 성묘(成墓)[[廢] 성릉(成陵)] - 공빈김해김씨 [[廢]공성왕후(恭聖王后) 김해김씨] 공빈 김해김씨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년~1577년 음력 5월 27일)는 조선의 제 14대 왕 선조(宣祖)의 후궁이자 추존왕후이며 임해군(臨海君), 광해군(光海君) 형제의 생모이다. 김해인 사포 김희철의 딸로, 궁인으로 입궐하여 선조의 승은을 입은 뒤 내명부 정 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종 2품 숙의(淑儀)로 있을 때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을 낳아 종 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차남인 광해군을 낳자 마침내 정 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김희철은 후일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였다.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의 시호와, 성릉(成陵)의 능호가 올려졌으나 광해군 폐위 후 시호 및 능호는 모두 삭탈되었다. 2013.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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