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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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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6

(순국선열) 의병장 이능권 -국립 대전 현충원- 대한제국기 강화도에서 활약한 대동창의진의 의병장. 별명은 능한(能漢). 경기도 강화 출신. 한국군대의 육군대장으로서 1905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중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하러 가는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감시망을 뚫고 국외로 회송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해산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의 군인 300여 명을 규합, 편성한 의병부대의 의병장이 되어 강화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의병부대를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陣)이라 칭하고 이호춘(李浩春)·유성준(兪成俊)·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 등과 더불어 강화군 길상면의 방의표(方宜杓)로부터 군자금 1,500냥을 조달하는 등 11개 곳에서 4만3800냥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강화도 .. 2023. 9. 9.
(독립운동가) 정주하 (정주화) -해주정씨, 종파(삼옥공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양성면으로 행진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 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1천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방화했다. 다시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2023. 8. 3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만호 홍진 국무령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만호 홍진 1877(고종 14)∼1946. 독립운동가.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면희(冕熹), 일명 진(鎭). 호는 만호(晩湖·晩悟). 충청북도 영동 출신이다. 1898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5년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 2016. 4. 24.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우강 양기탁 국무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우강 양기탁 1871(고종 8)∼1938. 독립운동가·언론인.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아버지는 양시영(梁時英)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儒林)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 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 2016. 4.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제2대 겸곡 박은식 대통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겸곡 박은식 1859(철종 10)∼1925.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용호(用浩)의 아들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 2016. 4.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국무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1858(철종 9)∼1932.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승목(承穆)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 201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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