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헌 정익
1617년(광해군 9)∼1683년(숙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제(子濟), 호는 욱헌(旭軒). 증조부는 정원희(鄭元禧)이고, 조부는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해성군(海城君) 정흠(鄭欽)이며, 부친은 해풍군(海豊君) 정효준(鄭孝俊)이다. 모친은 이진경(李眞卿)의 딸이고, 처는 박심(朴심)의 딸이다. 대사헌(大司憲) 정박(鄭檏)은 1652년(효종 3) 임진증광문과(壬辰增廣文科)에 병과(丙科) 16등으로, 필선(弼善) 정식(鄭植)은 1650년(효종 1) 경인증광문과(庚寅增廣文科)에 병과 3등으로, 정익(鄭익)은 1642년(인조 20) 임오식년문과(壬午式年文科)에 병과 13등으로, 참판(參判) 정석(鄭晳)은 1649년(인조 27) 기축정시문과(己丑庭試文科)에 병과 4등으로, 장령(掌令) 정적(鄭樍)은 1662년(현종 3) 임인정시문과(壬寅庭試文科)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오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게 되어 부친 정효준이 1663년(현종 4)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정익은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쳐 1670년(현종 11)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고, 그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정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을 따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72년 호조참판(戶曹參判), 1674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이듬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나갔다. 1676년(숙종 2) 도승지(都承旨), 1678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듬해 3월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였다. 9월에 다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가 11월 우참찬(右參贊)으로 전임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 이남 등 삼복(三福)의 일파로 지목되어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682년 재심으로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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