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
1575년~1641년 (선조8년~인조19년) 휘 혼(琿). 선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공빈김씨 소생의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을 비롯한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선조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여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국사권섭(國事權攝:임시로 나랏일을 맡아봄)의 권한을 받았다. 전쟁 동안 강원도·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및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난의 수습에 노력하고, 서울이 수복된 뒤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했다. 1594년 조정에서 명나라에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청했으나, 큰아들인 임해군이 있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붕당간의 파쟁이 확대되었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이 크게 대립했다. 1608년 병이 위독해진 선조가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즉위 후 곧 임해군을 교동(橋洞)에 유폐하고 유영경을 죽이는 한편,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여 초당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가 아들 백함(白緘), 사위 황보신(皇甫信)과 함께 순화군(順和君)의 양아들 진릉군(晉陵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고 하여, 대북파가 100여 명의 소북파를 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13년 조령(鳥嶺)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이유로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해에 살해했다(→ 계축화옥). 이어 1615년 대북파의 탄핵으로 능창군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을 제거하고, 1617년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건의하자 이듬해 인목대비를 삭호(削號)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 내용출처 : 브리태니커 일부 발췌>>
<<광해주 묘>>
<<문성군부인 문화류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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