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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묘

(문신) 태현 정약현, 공인 의성김씨

by 보현당 201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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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 정약현

 

 

공은, 휘(諱)는 약현(若鉉)이고 자는 태현(太玄)이다. 우리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지금 나주(羅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에 무관(武官)이 연달아 9세(世)를 이어 내려왔다. 시조 윤종(允宗)은 종3품 대장군이니 당시의 부장(副將)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문직(文職)이 연달아 9세를 이어 내려왔다. 그 사이에 은사(隱士) 연(衍)이 있으니 우리 태조가 혁명하던 초기에 은둔(隱遯)하여 벼슬하지 않고 위로 조상을 잇고 아래로 후손을 열어줌으로써 우리 정씨의 복을 돈독히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자급(子伋),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 우부승지 도복(道復)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서로 이어 9세를 전하였다. 승지공의 맏형에 휘 도태(道泰)란 분이 있는데, 음보(蔭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니 공에게 고조(高祖)이다. 증조부의 휘는 항신(恒愼)이니 진사이고,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이니 음보(蔭補) 통덕랑이다.


아버지의 휘는 재원(載遠)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에 신방진사(新榜進士)로서 연석(筵席)에 올라가 제의(祭義)를 강론하였더니 특지(特旨)로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벼슬이 오래되면서 치적(治績)이 있었고, 진주 목사에 이르러 임지에서 죽었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처사(處士) 하덕(夏德)의 딸이니. 개국원훈(開國元勳) 남재(南在)의 후예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 27) 5월 초6일에 공을 광주(廣州)의 마현(馬峴) 집에서 낳았다. 그 이듬해 10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유모(乳母)를 따라 수년간 외가에서 자랐다.


점차 장성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우고 약관(弱冠)에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 계묘년(1783, 정조 7) 봄에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이르러서야 진사시(進士試) 3등 제34인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나이 45세였다. 아, 늦었도다.


공은 염담 간정(恬澹簡靜)하여 분경(紛更 어지러이 변경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그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아직도 내가 어릴 때 일이 기억난다. 공이 바야흐로 《장자(莊者)》 소요유편(逍遙遊篇)과 제물편(齊物篇)을 읽고 있는데, 내가 그 글읽는 소리를 즐겨 듣느라 책상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돌아와 내 글읽는 것을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우리 선비(先妣) 윤 숙인(尹淑人)이 공을 자기 소생처럼 다독거리고, 공은 뜻을 받들어 잘 섬겼다. 아직도 내가 어릴 때의 일이 기억난다. 연천현(漣川縣) 관서에 있을 적에 윤 숙인이 공 및 형수 이씨(李氏)를 불러 당신 앞에서 쌍륙(雙陸)놀이를 하게 하였으니, 그 즐거움이 융융(融融)하였던 것이다.


신유년(1801, 순조 1)의 화에 우리 형제 3인이 모두 기괴한 화(禍)에 걸려서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갔다. 그런데 공은 조용하게 물의(物議) 가운데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우리 문호를 보전하고 우리 제사를 받드니, 어려운 일이라고 한 세상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초임의 벼슬도 임명받지 못하고 마침내 초췌하게 죽었다. 아, 애석하도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건륭(乾隆) 임자년(1792, 정조 16) 여름에 공이 약전(若銓)ㆍ약용(若鏞)과 함께 아버지의 위독한 급보를 듣고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러 부음(訃音)을 받고 밤낮없이 진주(晉州)로 달려가서 반구(反柩)하여 충주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또 돌아와서 열수(洌水)의 여막에서 곡하였다. 공이 곡할 적마다 사람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적삼 소매가 불그스름한 것을 보고 살펴보았더니 혈루(血淚)였다. 복을 마치고도 사모하는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아 그 집의 편액을 망하정(望荷亭)이라 하였다. 하담(荷潭)이 동남면에 있는데, 이 정자의 방향이 선영(先塋)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이른 것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최장방(最長房)이 신주를 옮겨간다."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주자(朱子)가 초년에 기록한 것이고, 만년에 이요경(李堯卿)ㆍ호백량(胡伯量)ㆍ심한(沈僩)에게 답한 여러 편지에 모두, 조천(祧遷)해버리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았다. 성호 선생(星湖先生 성호는 이익(李瀷)의 호) 및 안순암(安順菴 순암은 안정복(安鼎福)의 호)도 모두 만년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또 종족이 쇠체(衰替)하여 제사를 받들 수 없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중부(仲父) 옥천공(沃川公), 계부(季父) 가곡공(稼谷公)과 의논하여 장방(長房)이 신를 모셔가는 예법을 없애고 드디어 전승하여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중년에 자호(自號)를보연(鬴淵)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시고(詩稿) 3권이 있다.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신사년(1821, 순조 21) 가을에 돌림 역질(疫疾)이 갑자기 유행하여 9월 초4일에 옛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71이다.


초취(初娶 : 李檗의 누이동생)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아버지는 보만(溥萬)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할아버지는 달(鐽)인데 호남 병마사(湖南兵馬使)이며 부제학 정형(廷馨)의 후예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진흥(震興)은 젖먹이 때 죽었다. 딸로 맏은 황시복(黃時福)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홍영관(洪永觀)에게 출가하였으니 지금 정언(正言)이며, 다음은 홍재영(洪梓榮)에게 출가하였다.

 

재취(再娶)는 의성 김씨(義成金氏)이니, 아버지는 주의(柱義)이고 할아버지는 응렴(應濂)인데 사헌부 장령이며, 학봉(鶴峯) 성일(誠一)의 후예이다.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학수(學樹)인데 사람됨이 상서롭고 착하며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으나 장가들고 나서 요사하였다. 다음은 만수(萬壽)이니 이를 갈기도 전에 요사하였다. 다음은 학순(學淳)이니 지금은 섭제(攝祭 제사를 대신 지내는 일)하게 하고 있다. 딸로 맏은 정협(鄭浹)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권진(權袗)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김성추(金性秋)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목인표(睦仁表)에게 출가하였다. 홍영관(洪永觀)은 2남 1녀를 두었고, 나머지도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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