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
휘는 구(구), 자는 헌지(獻之), 시호는 정간(貞簡). 세종대왕의 제4남이며 모친은 소헌왕후 심씨이다. 대군은 성품이 조용하고 인자하며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학문을 닦는 데 힘써 시 · 서 · 경 · 사와 병서를 공부하였다. 또한 사물제작의 정교한 솜씨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받았다. 재능을 안 세종대왕은 화포제작의 감독을 명하였다. 대군이 제작한 화살은 종전에 2∼3백보 나가던 것이 천여 보 안팎까지 나갔다. 군사기기의 성능을 개량하기도 하여 대군은 `병기와 군사에 관한 지보(至寶)'라고 불렸다. 대군은 평생을 정의 · 성실 · 청렴 · 검약으로 일관하였으며, 부귀와 사치를 멀리 하였다. 세종대왕의 왕자들 중에 가장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또한 의기는 활발하고 의론에 뛰어나 사람들을 항상 감동시켰다. 무예에도 능하여 어전 시궁시 강궁으로 명중시키는 데 남달리 뛰어나 부왕과 문무백관의 예찬도 받았다. 20세 전후에는 기녀 금강매를 첩으로 두었는데 부왕의 경계하라는 말씀을 들은 뒤로 다시 그런 일이 없었다. 단종의 선위(禪位) 전후 수양대군은 여러 아우들의 동정을 살피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대군은 피눈물을 머금고 단신으로 대궐을 떠나 광주 의곡, 지금의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慕洛山)으로 은신하였다. 산중벽처에 초가를 세우고 불상을 설치하고 참선하며,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조석으로 산 정상에 올라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며 종묘사직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단종대왕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유배당한 영월을 바라보고 절하여 전왕을 흠모하는 마음을 빗대어 산이름을 `낙양을 사모하는 산'이란 뜻으로 모락산이라고 불렀다. 망배(望拜)하던 바위를 `사인암(斯仁巖)'이라 명칭하고 주변 일원 마을을 `의곡동(義谷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1469년(예종 1) 세조대왕이 승하한 지 몇 달 후인 이듬해 정월 5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함은 평생을 청백하게 살고 절개를 지켰으므로 정(貞), 진실하고 대쪽 같다 하여 간(簡)을 쓴 것이다. 자손들에게 유훈을 남겼는데 첫째는 `왕자, 왕손 간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 둘째는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자손들을 불러 모으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사후에 조가(朝家)의 예장을 받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쓰고 이어 `나는 본디 안평(安平)형님과 금성(錦城) 아우와 더불어 함께 절의에 죽고자 하였다' 하고 붓을 놓고서 숨을 거두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유지를 참작하여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신도비는 세우지 않았다. 후세에 묘비만을 세우고 행장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지어 석함(石函)에 담아 상석(床石) 밑에 묻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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