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이갑성
이갑성[李甲成, 1889.10.23~1981.3.25]한말의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상하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으며, 광복 후 여러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본관 전주(全州), 호 연당(硏堂)이다.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의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3년 신간회(新幹會) 사건으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 1940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이후 1927년에서 1945년까지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옥고를 치렀는데, 특히 1927년에서 1931년까지는 신간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루고, 1931년에서 1937년까지는 신간회사건으로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일경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그리고 1938년 이후에는 흥업구락부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로써 일제치하 36년 동안 총 1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 1947년 과도입법의원을 지냈고, 1950년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정무부장을 역임하고, 1963년 공화당(共和黨)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光復會長)에 취임,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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