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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회산군 이염 [정간공], 영원군부인 죽산안씨

by 보현당 2014.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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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산군 정간공 이염

 

회산군(檜山君) [1481(성종 12)∼1512(중종 7)] 휘는 염(?舌), 호는 보익당(輔翼堂), 시호는 정간(貞簡). 현록대부(顯祿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올랐다. 모친 숙의(淑儀) 남양홍씨는 중추부사 집현전 제학 일동(逸童)의 딸이다. 숙의 홍씨는 7남 3녀를 낳았는데 공은 이 중 2남으로 1481년(성종 12) 12월 13일에 탄생하였다. 성종대왕은 여러 왕자 중 공을 특별히 사랑하여 스승을 골라서 가르치고자 정광필(鄭光弼)에게 명하니 정광필이 김굉필(金宏弼)을 추천했다. 그리하여 임금은 김굉필이 도학(道學)이 있다 하여 공을 예관(禮官)과 더불어 그에게 보내며 하교하기를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사람이 편히 살기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곧 금수에 가까울 것이로다. 그런 까닭에 명하노니 내 유자(幼子)를 힘써 가르쳐서 호련(瑚璉)으로 만들어 주기 바라노라.”하였다. 성종대왕이 환후가 있어 공은 곧 입궐하여 시탕(侍湯)하며 주야로 시중들었으나 환후는 점점 위중해졌다. 임금은 공을 옆에 앉히고 유교(遺敎)하기를 “정궁 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폐비 소생 연산군은 나이가 가장 많으므로 대통을 이어갈 것이니, 만약에 정치가 어지럽게 되거든 네가 직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영의정 정광필과 의논해서 하여라.”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가을에 사옥(史獄)이 일어나 김종직과 남효온을 논죄하고 그 문하인을 연좌시켜 죄를 준다는 말을 듣고 공은 입궐하여 직간하기를 “춘추를 지을 때 삭(削)할 것과 필(筆)할 것을 분명히 하였는데, 김종직과 남효온은 공자를 배운 유신 등이요 김굉필과 정여창이 그 문하인이라는 죄목으로 연좌되어 벌을 준다면 착한 부류는 사라질 것이오니 바라건대 뒷날을 생각하여 논죄하지 마십시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고 오히려 노하였다. 이에 공은 선왕이 추대한 그 스승 김굉필을 구금하여 논죄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연산군비 신씨(愼氏)에게 역간(力諫)해 줄 것을 부탁하여 드디어 화를 면케 하였다. 연산군의 음학(淫虐)은 날로 더 심하여 사직이 위태로웠다. 이에 공이 근심과 번민 끝에 형 안양군(安陽君)과 아우 봉안군(鳳安君)과 의논하여 1500년(연산군 6) 6월 19일에 입조하여 울면서 간하기를, “왕위에 오른 지 6년 동안 국정을 돌보지 않고 미색과 사냥만을 즐겨 놀기만 하고 현신(賢臣)을 죽이고 간교한 무리를 가까이하니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근본이므로 초장왕(楚壯王)이 종고(鐘鼓)를 끊었던 것과 같이 새롭게 국정을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하였다. 3일을 극간하였으나 연산군은 나오지도 않고 오히려 대노하여 안양군과 봉안군 형제를 죽이고 회산군은 선왕이 애중하던 바를 참작하여 하옥토록 하여 사약으로 죽이고자 하였으나 대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그 사실을 알고 연산군을 불러 말하기를 “회산군 염은 선왕이 애중하던 바요, 국가의 주석이요, 종실의 동량이라. 해치지 말고 방면하시오.”하니 연산군도 할 수 없이 궐문 밖으로 내보냈다. 공은 탄식하면서 집으로 돌아온 후 사패 받은 궁전(宮田)을 되돌려 바쳤다. 연산군이 1506년 가을 폐위된 후 그 해 9월 2일에 중종대왕이 왕위에 오르니, 공에게 하교와 부름이 있었고 노비와 전답을 되돌려주고 청렴하고 곧은 성품을 칭찬하면서 사저(私邸)를 지어 하사하고 사저로 이사갈 때 공혜왕후가 현판을 새겨 하사하면서 호(號)를 보익당(輔翼堂)이라 하였으니 젊은 주상을 잘 보익하라는 뜻이었다.
 연산군 부자가 병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동생 영산군(寧山君)과 눈물을 흘리며 임금에게 고하여 강화 교동에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고유(告由)하기를, “두 아우, 염(恬)과 전(힜)이 아룁니다. 형님이시여, 지난날 울면서 간하였으나 이 어찌 듣지 않고 스스로 허물을 만들었으니 장차 혼백인들 어디로 돌아갈 것입니까. 비통함이 한이 없고 지극한 정은 살을 에이는 것 같습니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이제 여기에 다다르니 참으로 눈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형의 죄를 물어 쫓아내고 아우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음은 마음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종사를 위함이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존령은 노여움과 원망을 푸소서.”하며 곡하고 배례하였다. 그 후에 연산군 묘소를 지금의 방학동으로 옮겼다. 공은 상달(上達)하여 외손으로 봉사하게 하였으니 우애가 극진함을 알 수 있다. 유학계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찬에 의하면, `그 용모를 보면 흰 얼굴에 높은 콧마루, 푸른 기운이 도는 눈, 검은 수염이 길다. 그 기상이 늠름하고 마치 고송(高松)이 고고히 서있는 모습과 같다.(容貌白面,高準,碧眼,黑髥七寸五分,氣像凜凜,如高松特立之像)'이라 하였으니 회산군의 준모 기상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한일재상(閑逸宰相)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32세에 이르러 병환이 위중하게 되었다. 계자 계산군(桂山君)은 명의로 하여금 치료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물리치고 이르기를, “생과 사는 천명에 달렸다. 옛날 제나라 경공이 우산에 지는 해를 탄식하였고, 무제도 분수에 가을바람 부는 것을 슬퍼하였으니, 내 비록 편작(扁鵲)이 있다한들, 명이 짧아 죽는 것을 어찌 막을 것인가(死生有命, 昔齋景公, 歎牛山落照, 漢武帝,悲汾水秋風, 雖有扁鵲,死病何益)”이라 하였다. 1512년(중종 7) 4월 5일 임금은 내의(內醫)를 보내 진료케 하고 당약(當藥)을 하사하였으나 1512년(중종 7) 음력 4월 6일 별세하니 향년 32세였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번지 술좌에 예장하였다.
 배위 영원군부인 죽산안씨 묘와 쌍분이며 쌍분 중앙 전면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 `황명 정덕 7년 윤5월 11일 수. 술좌진향(皇明 正德七年閏五月十一日 竪. 戌坐辰向)'이라 기록되어 있다.
 배위 영원군부인 죽산안씨는 찬성(贊成) 방언(邦彦)의 딸로 음력 11월 5일 별세하였고 1녀를 두었는데 참봉 정수후(鄭守厚)에게 출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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