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민공 인성군 이공
휘는 공(珙), 호는 백인당(百忍堂), 시호는 효민(孝愍). 선조대왕의 7남으로서 정빈 민씨 소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선조대왕이 몹시 사랑했었다. 학업은 일취월장했고, 필법은 달관,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의 책임을 겸했는데 사무 처리가 너그럽고 엄하며 공명정대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또한 호령을 한번 내리면 모두들 두려워 했으며 광해군이 날로 꺼려했고 이이첨 등은 공의 인망을 시기하여 사형수에게 무고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궐하에 석고대죄하고 죄를 기다린지 수 일만에 울분으로 병이 나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인심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이유림(李有林)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었고 거기에 인성군이 관련되었다고 했으나 임금은 불문에 부쳤다. 그러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 또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하므로 인조대왕은 할수없이 인성군을 간성(杆城)에 유배시켰다가 곧 원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사면되어 돌아왔는데 1628년(인조 6) 정월 류효립(柳孝立)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때 또 인성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인목대비가 크게 놀라 죄를 물으라 하였다. 이에 인성군은 진도로 귀양보내졌고, 자진하라는 명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1628년 5월 20일, 41세 때였다. 이에 관련되어 부인 윤씨와 다섯 아들이 모두 제주도로 귀양갔는데, 10년 후에 정온(鄭蘊)과 강학년(姜鶴年)의 상소로 해평군 · 해안군 · 해원군 3형제는 강원도 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고, 해령군과 해양군은 어린 이유로 사면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정월 초하루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 절을 하고 호소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슬프더니 문득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말소리가 매우 가늘어 시종들이 자세히 듣지 못했고, 임금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임금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가 며칠 뒤에 서울로 돌아와 복작의 명을 내리니 설날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인성군이었다고 한다. 인성군은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유시(遺詩)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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