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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추존) 경릉(敬陵) - 덕종(德宗)

by 보현당 201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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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敬陵) - 덕종(德宗)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德宗, 1438년 ~ 1457년 9월 20일(음력 9월 2일))은 조선 초기의 왕족이자 왕세자, 작가이다. 세조의 장남이자 예종의 형이며 성종·월산대군 형제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정희왕후 윤씨이다. 145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 만에 2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사후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바로 의경왕에 추존되었다가 회간왕으로 추존되고 뒤에 덕종의 묘호가 올려졌다. 정식 시호는 덕종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며 왕에 추존되기 전에는 의경세자(懿敬世子)로 불렸다. 이(李), 는 장(暲), 초명은 숭(崇), 자는 원명(原明), 본관전주(全州)이다.

- 경릉은 추존왕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영되었다.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릉에서는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왕릉은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죽었고,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성종대에 이르러 왕릉의 규범에 따라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덕종의 비이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 왕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마모가 심해 현재는 그 윤곽만 살필 수 있다.
-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 7세 때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 1) 7월 26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1457년에는 병세가 악화되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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