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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묘

(무신, 사육신) 벽량 유응부 [충목공]

by 보현당 2015.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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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공 벽량 유응부

 

단종복위를 추진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경원절제사를 지내고 1452년(단종 즉위) 의주목사, 1453년 평안좌도절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 왕권이 강화되고 신권이 약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세조의 불의의 찬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大義)가 내세워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다. 세조가 상왕(上王: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여 벌인 연회에서 성승(成勝)과 함께 별운검(別雲劒)을 맡게 되자 그 자리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세조가 연회 당일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했으며, 왕세자도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대로 거사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의 만류로 모의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이때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단종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를 포함한 주모자 6명은 체포되어 형살(刑殺)되거나 자살했으며, 이에 연루된 70여 명이 화를 당했다. 세조가 국문하면서 그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라고 묻자, "한 칼로 족하(足下:세조를 가리킴)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대답하여 극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1691년(숙종 17) 12월 사육신을 국가에서 공인함으로써 복관되었으며, 1791년 2월 절의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때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정조대왕의 시문집 홍재전서 제60권 잡저7 장릉배식록 정단32인편에서 유응부의 본관이 천녕임을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贈兵曹判書行都摠府都摠管忠穆公兪應孚字善長川寧人登武科至丙子與成勝朴崝爲別雲劍事發而死...) 

<출처:http://www.skk.or.kr/xe/2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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