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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이혜련 여사

by 보현당 2016.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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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로 당 27세, 어머니 황씨는 당 32세, 형은 치호(致浩)이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1896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 학당에  입학하여, 이 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서구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과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

는 고향에 돌아와 근대 학교인 점진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하였다.
 

대한 매일 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1912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서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아 활약하고,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의거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 옥살이를 하다가 가출옥하여 숨어 살았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병보석으로 치료중에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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