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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남녕군 나재 홍명구[충렬공], 정경부인 평산신씨 -남양홍씨-

by 보현당 2016.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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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녕군 충렬공 홍명구

 

1596년(선조 29)∼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참의 홍서익(洪瑞翼)의 아들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 같은 선비들이 칭찬하고 장차 큰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장원하였으나 시골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1625년 부수찬이 되고, 1627년 직강을 거쳐 교리이조좌랑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1633년 우승지가 되고, 1635년 대사간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이미 평양을 지났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남하(南下), 김화(金化)에 이르러 적의 대병을 만났다. 글을 지어 시자(侍者)에게 주어 노모에게 결별(訣別)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싸워 적 수백명을 살상한 끝에 전사하였다. 이에 선봉 유림(柳琳)이일원(李一元)이 힘껏 싸워 적을 물리치니, 병자호란 때 적을 이긴 싸움은 이 전투와 김준룡(金俊龍)의 광교(光敎)싸움 뿐이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50년(효종 1) 김화 고을 사람들이 순절한 터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웠고, 1652년 의열(義烈)이라 사액되었으며, 여주기천서원(沂川書院), 평양충정서원(忠正書院), 자산(慈山)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순조 때 자손 홍병륜(洪秉輪) 등의 주청으로 체천(遞遷)하지 않는 은전이 내렸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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