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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공 수부 정광필
1462년(세조 8)∼1538년(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으로부터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며, 신용개(申用漑)로부터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 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함으로써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자료출처 : 한국의역대인물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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