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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

(고려왕릉) 홍릉(洪陵) - 고종(高宗) [사적 제224호]

by 보현당 201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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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고려 고종의 능.  사적 제224호. 지정면적 298㎡. 『고려사()』에는 홍릉(), 『신증동국여지승람(輿)』·『여지도서(輿)』 등에서는 홍릉()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종이 1259년(고종 46) 6월 임인일()에 재상 유경()의 집에서 승하하자, 그 해 9월 기미일()에 홍릉에 장례지냈다. 그 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봉분()하였다. 능역()은 3단면으로 되어 있고 14단에 능이 있는데 높이 5척, 지름 14척으로 규모가 작다. 능의 네 모퉁이에 석수()가 각각 1구씩 배치되어 있고, 그 앞 2단면에는 각주형()의 문인석() 2쌍이 마주하고 있으며, 조선 태조 초년에 건립한 소비()가 있다. 병석()은 3개가 남아 있으나 12각형으로 능을 둘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앞에 정자각()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화홍릉 [江華洪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192(명종 22)∼1259(고종 46). 고려 제23대 왕. 재위 1213∼1259. 이름은 철(㬚), 초명은 진()·질(), 자는 대명()·천우(). 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이다.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6년의 재위기간 동안 최씨()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1218년, 최충헌()이 70세로 치사()하려고 하자 궤장()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고, 이듬해 왕씨()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 해 최충헌이 죽었으나, 그의 아들 우()가 정방()을 통해 백관의 인사를 전단()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과 별장 김인준()이 의()를 죽임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 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몽고의 침입에 대항해 강도(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 문화재의 손실을 가져왔다. 1232년 대구부인사()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과 1235년 경주의 황룡사구층탑이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1259년 몽고와 강화를 청하기 위해 태자 전( : 뒤의 )을 몽고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고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 같은 태자의 친조()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불력()에 의해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에 착수하였다.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 최보순(), 수찬관 김양경()·임경숙()·유승단() 등에게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해 사관()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종 [高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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