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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동원 이원수 -월성이씨, 고향의 봄 작사-

by 보현당 201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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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1월 17일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하였다. 창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922년 마산으로 이주하여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인 1926년 《어린이》지에 동요 《고향의 봄》이 당선되었다. 자신의 고향과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며 1935년 작곡가 홍난파()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마산공립보통학교 재학중 일본인들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교내신문에 기고 하였다. 1927년 당시 중학교 과정인 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상고를 거쳐 현, 용마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기쁨사》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여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의 장르를 개척했고 아동문학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산공립상업학교 졸업후 함안금융조합에 취업하였으며 1935년 2월 반일독서회 모임이었던 '함안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이듬해 문학동반자였던 최순애와 결혼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변절하여 1942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친일잡지인 《반도의 빛()》에 일제의 전쟁과 황군병사를 찬동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지원병을 보내며》, 《낙하산》이 수록되었다. 1943년에 발표한 《보리밭에서-젊은 농부의 노래》에서는 전쟁중인 상황에서 장병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풍작을 기원하는 농부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1940년 일제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백제의 고도()인 부여()에 일본 신궁() 건설을 착공하였는데 당시 이곳을 방문하여 근로봉사를 하였고 그 감회를 《고도의 감회- 부여신궁어조영() 봉사작업에 다녀와서》라는 글을 지어 남겼다. 

8·15광복 후에는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1946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도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하였다. 1947년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이 되어 1947년 《종달새》라는 문학집을 간행하였고, 1948년 그림동화집 《봄잔치》를 출판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다. 1951년 1.4후퇴 당시 세명의 자녀(영옥, 상옥, 용화)를 잃어버렸고 자신은 영국군을 지원하는 노무자로 뽑혀 동두천에서 1년간 천막생활을 하였다. 1952년 제주도 고아원에서 장녀인 영옥을 찾았다. 같은해 《소년세계》를 창간하였고 주간을 지냈다. 1953년 장편동화 《숲 속의 나라》, 《오월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1954년 아동문학학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을 지냈으며 1956년 《어린이 세계》라는 아동 월간지를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60년 동화집 《파란 구슬》 등을 출판하였다. 그 밖에 1961년 《이원수아동문학독본》, 1962년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출간하였다. 1965년 경희여자초급대학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71년 회갑을 맞아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간행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를 지냈고, 1971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1월 24일 구강암으로 사망하였다. 1982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2003년 12월 경상남도 창원시 서화길18(서상동 산60번지)에 〈이원수문학관〉이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원수 [李元壽] (두산백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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