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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에 미친 사람 -석치 정철조-

by 보현당 201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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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루에 미친 사람 "석치 정철조"

 

석치 정철조 필자인 저의 8대 조부님 이십니다. 오늘은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004년도 "시간여행 역사 속으로" 프로그램에서 저의 8대 조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적이 있어 소개 하고 자 합니다.
 
병세재안록에 벼루에 미친 사람이있으니 그 이름은 정철조 호는 석치(石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석치(石痴) 뜻을 풀의 하자면 돌이 미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왜 그런 호를 사용하셨는지 그분이 얼마나 괴짜 셨는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석치 할아버지는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으니, 석치라는 호가 철조할아버지와 잘 어울립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정언이라는 벼슬을 하셨지만,  기록을 보아 벼슬에 뜻이 있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8대 조부님께서는 그림과 지금으로 말하면 기계설계 부분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특히 그림에 있어서 그 동생 정순조와 함께 많은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생각하나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2점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희영 루카에게 그림을 가르치신 분도 정철조 정순조 형제분 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평가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분에 대한 행적과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많은 실학사상가들과 친분을 쌓고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와 함께 학문을 연구하며 각자의 취미생활을 통해 마니아로서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기술을 부귀영화로 사용하지않고 취미로 벼루를 깎았으며, 벼루를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내어주신 석치 할아버지의 인품은 후손으로서 본받을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증조부께서는 집에 온 손님은 그 자가 거지라 할지라도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가훈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또한 석치할아버지께서 후손들에게 정신으로 남겨준 유산이 아닌지 되셔 겨 봅니다.   
 
 
 
<<석치 할아버지 약사>>
1730년(영조 6)∼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석치(石痴).

증조부는 정중구(鄭重龜)이고, 조부는 정필녕(鄭必寧)으로 1714년(숙종 40) 갑오증광문과(甲午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정운유(鄭運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운유는 1756년(영조 32) 병자정시문과(丙子庭試文科)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고 1794년(정조 18)에 익정(翼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어머니는 원휘(元徽)의 딸이다.

그는 1777년(정조 1) 정유증광사마시(丁酉增廣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합격하였고 현감을 지낸 정후조(鄭厚祚)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정순조(鄭順祚)를 동생으로 두었다. 한편 그의 큰 여동생은 반남(潘南) 박사설(朴師說)의 아들 박우원(朴祐源)에게, 작은 여동생은 여주(驪州) 이용휴(李用休)의 아들 이가환(李家煥)에게 시집을 갔다. 말하자면 석치금대(錦帶) 이가환은 서로 처남매부지간이다. 정철조는 1774년(영조 50) 갑오증광문과(甲午增廣文科)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그는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는 인척관계로 맺어졌으며, 이른바 연암 집단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다. 그 외 이용휴, 이가환 부자, 정상기(鄭尙驥), 황윤석, 김이안(金履安) 등과 교유하였다.

정철조는 1772년(영조 48) 이후로 연암 집단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문학과 예술, 실용적인 학문 등을 연마하였다. 그는 인중(기중기), 승고(도르래), 마전(맷돌), 취수(수차) 등과 같은 기계들을 손수 만들고 그것을 시험하였다. 그는 서양과학서적을 연구하여 천문관측이나 역산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다. 그는 또한 동국지도를 만든 정상기와 교류하였는데, 여지도 방면에 심오한 학문적 조예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밀한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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