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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벼루 장인 -석치 정철조-

by 보현당 201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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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그렇지만 벼루 깎는 장인은 좀체 그 이름을 남기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벼루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인물이 있다. 그것도 벼루를 전문으로 만드는 기술자도 아닌, 문과에 급제해서 정언 벼슬까지 지낸 양반 사대부가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정철조다. 당시 안목 있다는 사람으로 그가 깎은 벼루 하나쯤 소장하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라는 그의 벼루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정철조와 그의 벼루를 소개한다.

벼루에 미친 사람

정철조(鄭喆祚, 1730~1781)는 본관이 해주로 자는 성백誠伯, 호가 석치石癡다. 45세 나던 1774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아버지 정운유(鄭運維, 1704~1772)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정철조는 그의 장남이었다.
정철조는 연암 박지원, 담원 홍대용 등과도 지속적인 교류를 나누었고, 이러한 교유의 과정에서 이용후생학에 눈을 떴다. 그는 기계 제작에 뛰어난 솜씨를 지녀, 인중引重, 승고升高, 마전磨轉, 취수取水 같은 기계들을 직접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는 지도 제작에도 조예가 있었고, 천문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해시계를 직접 만들어 시간을 측정하기도 했다. 그림 솜씨도 빼어났다. 한마디로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의 여러 재주 가운데 단연 흥미로운 것은 벼루 제작자로서의 명성이다. 그는 좋은 돌을 보기만 하면 즉석에서 차고 있던 칼을 꺼내 순식간에 벼루를 깎았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는 그의 벼루 만드는 솜씨를 이렇게 묘사했다.

죽석竹石 산수를 잘 그렸고,벼루를 새기는 데 벽이 있었다. 벼루를 새기는 사람은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고, 새김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단지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새기는데, 마치 밀랍을 깎아내는 듯하였다.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만 보면 문득 팠는데, 잠깐 만에 완성하였다. 책상 가득히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주었다. 돌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돌만 보면 팠고, 달라는 대로 주었다고 했다. 그의 호는 석치石癡인데,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이다. 그가 돌, 즉 벼루에 미친 벽이 있었으므로, 호까지 이렇게 붙였다.

자연스런 결을 살려
전통시대에 벼루는 문인의 필수품이었다. 좋은 벼루에 대한 문인들의 애호는 유난했다. 오죽하면 허균 같은 이는 깨어진 것이라도 좋으니 중국의 단계 벼루 하나만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한 적도 있다. 벼루는 각 지역마다 산지가 있고, 산지에서 직업적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런데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벼슬까지 오른 관리가 틈만 나면 벼루를 깎는 취미를 가졌다. 그것도 품격과 안목에서 장인들의 기예를 훨씬 능가하는 작품이었으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안동의 마간석은 검붉은 흙빛이요            
남포의 화초석은 벌레가 좀먹은 듯.             
삼한의 둔한 장인 멍청하기 짝이 없어            
온 나라가 온통 모두 풍자식(風字式)을 쓴다네.        
근래 들어 명사에 석치란 이가 있어            
가을꽃과 귀뚜라미 즐겨 새기었다네.            
홍주 땅의 아전이 그 방법을 배워서             
원래 생긴 돌 모양에 대략 꾸밈 더한다네.        

유득공이 〈기하실장단연가幾何室藏端硯歌〉란 작품에서 석치의 벼루에 대해 쓴 대목이다. 모두들 바람 풍자 모양의 풍자식風字式 벼루만을 쓸 때 그는 안동 마간석과 남포의 화초석에 가을 국화와 귀뚜라미 같은 벌레를 아로 새겨 높은 품격을 뽐냈다는 내용이다. 홍주의 소리小吏가 그의 방법을 배워, 원래의 돌 모양을 살려 조각을 새기는 방식으로 역시 이름이 났다.
이렇게 보면, 정석치의 벼루는 특징이 원래 돌의 생김새와 성질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서 자연스럽게 조각을 얹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인위적인 조작이나 인공의 가공을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심노숭沈魯崇은 또 〈정석치연소지鄭石癡硯小識〉란 글에서 “석치 정씨의 벼루는 근세에 무거운 이름이 있었다. 예단에서 노니는 사람은 이를 지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도 젊어서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하다가 잃어버렸으므로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적었다. 당대 예원을 주름잡았던 강세황의 손자 강이문姜彛文의 집에도 예전 정철조가 글씨 부탁을 하고 답례로 가져온 벼루가 있었다. 강세황은 그의 벼루를 두고, 지금까지 본 천 여개의 벼루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고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심노숭은 이 말을 듣고 직접 안산까지 찾아가서 정철조의 벼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데, 풍자형의 벼루로되, 본래 생김새에 따라 약간의 요철을 그대로 살려 두었지만, 갈고 깎은 정밀함만큼은 보통 사람이 절대로 미칠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었다고 적었다.


그림으로 남은 벼루
정철조가 깎은 수많은 벼루 중 실물로 남은 것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박영철(朴榮喆,1879~1939)이 소장했던 것을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이 그린 정철조의 벼루 그림은 남아있다.

이 벼루는 원래 정철조가 그의 사돈이었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에게 선물한 것이다. 벼루 앞면에는 이용휴가 직접 새긴 “손은 글씨를 잊고, 눈은 그림을 잊는다. 돌에서 무얼 취할까? 치癡와 벽癖이 으뜸이다.[手忘書, 眼忘畵. 奚取石, 癡癖最.]”라는 내용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정철조가 만든 벼루이니, 자자손손 영원히 보물로 사용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질박하고 꾸밈없는 전형적인 조선 벼루의 모양새를 지녔다.
정철조! 그는 다방면에 걸쳐 다재다능했던 재주꾼이었다. 그가 52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자 연암 박지원은 해학이 넘치면서도 깊은 정을 담은 제문을 지어, 그를 잃은 슬픔을 달랬다. 근세 위당 정인보 선생도 〈정석치가鄭石癡歌〉란 제목의 한시를 지어서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작품으로 형상화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넓고 깊은 학문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다.
뛰어난 벼루 예술가로서의 정철조의 면모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용후생학자로서의 그의 참된 면모를 밝혀내는 일도 시급하다. 그는 18세기에 유행했던 새로운 방식의 지식 경영에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호기심과 열정과 탐구욕이 그를 나타내는 어휘들이다.



▶글_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사진제공_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저자, 권도홍 <문방청완> 저자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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