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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묘

(문신, 충북 충주시) 효사 이인실, 숙부인 경주김씨 -경주이씨-

by 보현당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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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어 이공 묘표(司禦李公墓表)

이인실『李仁實, 1607년(선조40) ~ 1675년(숙종1)』

병진년(1676,숙종2) 명재(明齋)윤증(尹拯)찬(撰)

경주 이공(慶州李公)은 휘가 인실(仁實)이요.자는 효사(孝思)이고,나의 선친과는 진사시에 동방입격(同榜入格)하여 친분이 아주 두텁다.게다가 공의 아들 정(烶)이 선친에게 학문을 배웠고,선친의 초상(初喪)때에 공이 제문을 지어 와서 제사를 올리고 갔다.

선친을 여의고 남은 목숨을 병으로 누워 지내다 공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 곡을 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었는데,아들 정이 번거롭게도 상복 차림으로 먼 길을 찾아와 공의 묘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니,글재주가 없다 하여 어찌 차마 거절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공의 세보(世譜)는 신라에서 시작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알평(謁平)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고관대작이 대대로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고조 휘 자침(自琛)은 성균관 생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증조 휘 란(鸞)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조부 휘 유일(惟一)은 판관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익(瀷)은 호가 간옹(艮翁)으로 깨끗한 명망과 곧은 절개로 광해군의 혼란한 시대에 이름이 났으며,마지막 관직은 장령이고 전한(典翰)에 추증되었다.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현감 길원(吉元)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정미 년(1607,선조40)에 태어났다.나이 열두 살 때 부친 간옹을 따라 제주(濟州)의 유배지로 갔으며,겨우 성동(成童)의 나이에 경사(經史)를 다 배웠다.

돌아와서는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의 문하에 들어가니 문장이 더욱 발전하여 동료들이 모두 공과 교유하기를 선망하였다. 18세에 간옹의 상을 당하였는데,여묘 살 이를 하며 예법을 다하였다.

계유년(1633,인조11)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만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더는 관직에 진출하려는 뜻을 두지 않았다.

효종 임진년(1652,효종3)에 경전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인물로 천거를 받아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고,사옹원 봉사와 종묘서 직장을 거쳐 의금부 도사로 승진하였다.그리고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나갔는데,토호(土豪)들을 억누르고 빈민들을 구휼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결국 이 때문에 체차되고 말았다.다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한성부 판관,의빈부 도사,귀후서 별좌(歸厚署別坐),사재감 주부,장례원 사평을 역임하였고,서너 차례나 세 아문의 낭관에 의망되었다.

공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명성을 얻기 위해 매달리지 않았고 오직 처한 상황에 따라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관직에서 물러나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거처가 썰렁하여 가난으로 자주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날마다 새와 물고기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월을 보냈다.

산 한쪽에다 별도로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소나무와 매화를 심어 놓고 산속을 거닐며 생활하였는데,늙음을 한탄하거나 처지가 낮은 것을 비관하는 기색을 비친 적이 없었다.만년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으나 익위사가 혁파됨에 따라 곧바로 옛집으로 돌아왔다.

시국이 변하여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누워서 수시로 천장을 바라보며 남몰래 탄식만 하다가 을묘 년(1675,숙종1) 5월에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충주(忠州)시곡(柿谷)의 선영 옆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방정하고 의리를 좋아하며 화려함이 없이 간결하였다.일찌감치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옛 성현의 책을 읽기 좋아하였으며 이에 따라 관직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려갔다.조금이라도 옛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거나 시세를 좇아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비루하게 여겨 배척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소인배라면 아주 질색하였으므로 속류(俗流)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은 하는 일 없이 녹만 받아먹는 그런 따위의 관직 생활이 아니었는데,나의 운명이 시대상황과 서로 어긋나 결국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벼슬을 한 것은 단지 가난을 면하려는 것일 뿐이었다.만약 풍요하게 살고자 벼슬하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너희에게 무엇을 남겨 줄 수 있겠느냐.”하였는데,여기에서 공이 무슨 마음을 기른 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접하였고 겉모양으로 사귀지 아니하였으니,승지 이석(李晳),봉사 조국로(趙國老)와는 옛 성현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교제를 하였다.

부인은 김씨(金氏)로 또한 본관이 경주(慶州)인데,엄격하고 법도가 있으며 각종 전적에도 조금씩 통하였다.부친 원량(元亮)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오르고 포의(布衣)에서 곧장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적신(賊臣)김자점(金自點)의 모함에 빠져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부인이 평생토록 이를 슬퍼하였다.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나중에 부장(祔葬)되었다.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낳았다.장남 정(炡)은 공의 초상을 다 치르지 못하고 죽었다.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몹쓸 병에 걸려 죽었으므로 공의 유언에 따라 아우의 아들 모(某)를 후사로 삼았다.

둘째 아들 형(炯)은 진사이고 딸 둘을 두었으며,셋째 아들 성(煋)은 공보다 먼저 죽었는데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두었으며,넷째 아들 병(炳)또한 아들딸 하나씩 두었고,막내아들은 앞에서 말한 정(烶)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다.이들 손자들은 모두 어리다.

장녀는 군수 이지웅(李志雄)에게 시집갔다.아들 넷을 두었는데 세황(世璜),세구(世球),세관(世瓘),세환(世瑍)이고,딸 둘을 두었는데 윤규(尹揆)와 윤소(尹熽)에게 시집갔다.둘째 딸은 사인 조일기(曺一夔)에게 시집갔다.

아,공은 명망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굳은 지조와 훌륭한 행실을 쌓았고 외적인 화려함과 내적인 질박함을 동시에 갖추었다.따라서 높은 자리를 얻고 뜻을 펼쳐서 세상에 이름을 날렸어야 마땅하거늘 보잘것없는 관직을 전전하면서 궁핍하게 세상을 마쳤으니,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수에 만족하고 자신의 지조를 지켜서 외부에서 부여된 관직에 따라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남들은 공의 불운을 한탄하였으나 자신은 그러한 상황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니,공은 타고난 복은 박하지만 쌓은 덕은 후한 사람이라 하겠다.

공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가문을 계승하여 공이 받지 못한 복을 받을 사람은 아마도 후손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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