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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군(관직)묘

(공신, 충남 부여군 ) 풍원부원군 조현명 [충효공], 정경부인 칠원윤씨, 정경부인 안동김씨 -풍양조씨-

by 보현당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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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양(). 자는 치회(), 호는 귀록(鹿)·녹옹(鹿). 조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정()이고, 아버지는 도사() 조인수()이다. 어머니는 김만균()의 딸이다.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使)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 3등에 녹훈, 풍원군()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 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군액()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송인영·박문수()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현명 [趙顯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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