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사균(士均). 고조할아버지는 임중선(任中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임효돈(任孝敦), 할아버지는 임한(任漢)이며, 아버지는 공조 판서 임유겸(任由謙)이다. 어머니는 이신(李愼)의 딸이다. 아들은 임호신(任虎臣)이다. 동생은 예조판서를 역임한 임권(任權)이다. 임추(任樞)[1482~1534]는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급제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하였다. 임금이 신하들과 공부를 하고 정사를 토론하는 경연(經筵)에서 임추는 논리정연하고 조리 있는 말로 임금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1513년(중종 8) 지평, 다음해 교리가 되었다. 1516년(중종 11)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었고, 사헌부 장령을 지낼 때는 언관의 역할을 살리고, 언로를 개방할 것을 상소하였다. 경연에 참여해서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공녀(貢女)로 바칠 처녀를 뽑는 일과 그에 따른 헛소문을 금지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1519년(중종 14)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중국에서 현지인들을 자상하게 대하여 임추와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누구나 깊은 공경심을 표하며, 후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와 전한, 직제학,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526년(중종 21) 대사간이 되어 시정(時政)에 대해 장문의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30년(중종 25) 좌승지로 경상도 감사를 지냈고, 이듬해 한성 우윤이 되었다. 1532년(중종 27)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비판하였다가 강원 감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임추는 김안로의 추종자들에게 “너희 무리가 어찌하여 나라 일을 이 꼴로 만들었느냐?”고 책망하였다. 1533년 임추는 동지사(冬至使)로, 아들 임호신은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영광이 누렸으나 1534년 귀국 길에 병을 얻어 중국 고령역(高嶺驛)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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