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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토정비결) 토정 이지함, 공인 완산이씨 - 한산이씨-

by 보현당 202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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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현 마포 용강동 부근)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아버지 이치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507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와 수원 판관 등을 지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판관을 지낸 김맹권(金孟權)의 딸이며, 김맹권은 세종으로부터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았으나 수양대군이 집권하고 단종이 죽게되자 낙향하여 여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1517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형 지번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형의 보살핌을 받았다. 후일 이지함은 지번의 아들인 산해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산해가 태어났을 때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 될것이라고 예견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모산수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혼인하여 산두(山斗)·산휘(山輝)·산룡(山龍)과 서자인 산겸(山謙)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산룡은 역질에 걸려 죽었다. 산겸은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웠으나 역모죄를 받게 되었다. 장인 이정랑은 윤원형이 꾸민 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태형을 받고 능지처사되고 말았다.

이지함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었고 1574년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아산현감으로 있던 윤춘수(尹春壽)가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려 원성이 높자 1578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토정비결 土亭祕訣》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령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지함 [李之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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