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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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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5

(문신, 경기 광주시) 유재 이현석, 정부인 안동권씨 -전주이씨-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游齋). 수광의 증손으로 당규(堂揆)의 아들이다. 1667년(현종 8)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에 보직된 뒤 삼사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 14) 우승지가 되었으나, 송시열 등 서인(西人)의 예론(禮論)을 반대하다가 철원에 부처(付處)되었다. 1688년(숙종 14) 다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91년(숙종 17) 동지중추부사, 1693년(숙종 19) 춘천부사를 지냈다. 이듬해 청풍현감을 자원하여 나가 을 저술하였으며, 그 뒤 한성부 부윤 · 우참찬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관한 여러 소장과 저서를 제진(製進)하였다. .. 2022. 12. 21.
(문신, 우의정, 경기 광주시) 고불 문정공 맹사성 -신창맹씨, 청백리- 고려·조선의 명상(名相). 시호는 문정(文貞), 자(字)는 자명(自明), 호(號) 고불(古佛)·동포(東浦), 전교 부령(典敎副令) 희도(希道)의 아들. 온양(溫陽) 출신. 권근(權近)의 문인. 1386년(우왕12)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춘추관검열(藝文春秋館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수원 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 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역임,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 참의(吏曹●議)·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侍從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 부윤(漢城府尹)이 되고, 1408년 대사헌으로 왕에게 알리지 않.. 2022. 11. 22.
(문신, 경기 광주시) 동지충부사 서흔남, 정부인 한씨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에서 태어났다. 천민으로 기와 잇기와 대장장이, 장사꾼 등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성 안팎의 소식이 끊기자 전령을 자처하였다. 한지에 쓴 왕의 유지(諭旨)를 노끈으로 꼬아 옷으로 얽어매고 거지와 병자 행세를 하며 적진을 빠져나가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에 전하고, 적의 동태를 알려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천민 신분을 벗고 정2품 당상관인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667년 사망하여 광주군 중부면 검복리 병풍산에 묻혔는데 이후 후손들이 화장하여 묘비를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으로 옮겨놓았다. 한편, 그와 관련하여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던 인조를 등에 업고 무사히 대피시.. 2022. 8. 17.
(천주교 복자, 경기 광주시) 복자 정철상 가를로 -나주정(丁)씨- 본관은 나주이며, 세례명은 가롤로이다.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약종(丁若鍾)과 한산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839년에 순교한 유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다. 정하상(丁夏祥) 성인과 정정혜(丁情惠) 성녀의 이복형이며, 포천 출신인 홍교만(洪敎萬) 복자(福者)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집안 어른이 천주교를 금지하고 신부를 고하라며 송곳으로 찌르기도 했지만, 정철상은 결코 신부를 고발하지 않았다. 이처럼 유명한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아버지 정약종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의미를 .. 2022. 8. 7.
(천주교성인, 경기 광주시) 성 가록 정하상 바오로 -나주정(丁)씨- 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 세례명 바오로. 본관은 나주(羅州). 경기도 양근 출생.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인 약종(若鍾)의 둘째아들이며, 약용(若鏞)의 조카이다. 어려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던 중 1801년(순조 1)에 아버지와 맏형 철상(哲祥)이 순교하자 어머니는 어린 남매인 하상과 정혜(情惠)를 데리고 시댁이 있는 마재(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홀로 서울에 다시 올라와 조숙(베드로) · 권천례(데레사) 부부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그러던 중 1816년 동지사(冬至使) 통역관의 하인이 되어 북경에 들어가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그러나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뒤..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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