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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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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노씨5

(문신, 경기 양평군) 호폐헌 조직[헌민공], 정경부인 나주박씨 -교하노씨- 조선전기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사치(士稚), 호는 별유(別宥)·호폐헌(好閉軒)·망포(望浦). 노철강(盧鐵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통례 노언방(盧彦邦)이고, 아버지는 현감 노홍우(盧弘祐)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알성 문과에 장원, 형조좌랑이 되었는데 형옥(刑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녀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1573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군정보충(軍丁補充)의 임무를 맡아 전라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예문관제학을 거쳐 1576년 수찬이 되고, 동부승지를 거쳐 1582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585년 부제학에 이어 호조·예조판서, 이듬해 시약청제조(侍藥廳提調)가 되었으며, 그 뒤 지중추.. 2022. 7. 30.
(문신, 경기 양평군) 사형 노직, 정경부인 청송심씨 -교하노씨- 조선시대 병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사형(士馨). 노철강(盧鐵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통례(左通禮) 노언방(盧彦邦)이고, 아버지는 현감 노홍우(盧弘祐)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생원이 되고 158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 주서로 옮겼으며, 그 뒤 감찰·좌랑·지평을 거쳐 병으로 체직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을 호종할 때 말에서 떨어져 다쳤으나 계속 성천의 행재소(行在所)까지 달려가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 개성유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경강주사대장(京江舟師大將)을 지내고, 접반정사(接伴正使) 김명원(金命元) 밑의 부사로서 명나라 지휘관 형개(邢玠)를 맞아 군사문제를 논의.. 2022. 7. 30.
(세조) 창원군 이성 [장소공], 덕양군부인 교하노씨, 광산군부인 광주정씨 -전주이씨- 창원군 장소공 이성 창원군(昌原君) [1455(세조 1)∼1505(연산군 11)] 휘는 성(晟), 시호는 장소(章昭). 세조대왕의 2남이며 덕원군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근빈(謹嬪) 박씨이다. 1464년(세조 10) 군으로 봉해지고, 1481년(성종 12)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랐다. 창원군은 군자의 기풍을 갖고 항상 효도하고 우애롭고 덕화(德化)의 도에 힘쓰고 여가에 문학을 익혔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창원군의 묘소는 시흥군 동면 팔애동 신림(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병좌에 예장했었다. 그러나 실전되어 내려오다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묘소부근에 살고 있던 윤씨들이 석물을 비롯하여 묘역을 마구 훼손하여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에 판윤 11대손 동현(東鉉)은 의.. 2016. 8. 21.
(문신) 국일재 노공필, 정경부인 한산이씨 -교하노씨- 국일재 노공필 1445(세종 27)∼1516(중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 할아버지는 동지돈영부사 물재(物載)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사신(思愼)이며, 어머니는 첨지(僉知) 경유근(慶由謹)의 딸이다.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 지금의 파주)출신이다. 1462년(세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사직서영(社稷署令)을 지낸 뒤 1466년 춘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 성균관직강이 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부제학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참의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483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1489년에 공조판서가 된 데 이어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498년(연산.. 2016. 6. 22.
(관직) 교양부원군 노물재 교양부원군 노물재 ?∼1446(세종 2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아버지는 우의정 한(閈)이며, 부인은 심온(沈溫)의 딸로서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1431년(세종 13) 유거감찰(謬擧監察)에 임명되었을 때 최안우(崔安雨)의 천거에 사사로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되지는 않았다. 그뒤 첨지중추부사·동지돈령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회신(懷愼)·유신(由愼)·사신(思愼)·호신(好愼) 등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사망 후인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고, 같은해 부인이 죽자 부의는 물론 곡식과 종이·관곽까지 하사받았다. 1490년(성종 21)에는 물재의 재산상속시 그의 유서 중에 첩자에게는 재산상속을 하지 말라는 문구가 있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경국대.. 201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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