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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당 묘지에서 역사인물을 만나다.
  • 보현당의 묘지기행
  • 수곡당, 지국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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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4

(애국지사) 최성모 -민족표대33인- 애국지사 민족대표 33인 최성모 1874년 ~ 1937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19년 2월,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中央基督敎靑年會)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기로 한다. 2월 26일 이승훈(李昇熏), 오화영(吳華英), 이필주(李弼柱), 함태영(咸台永), 안세환(安世桓), 이갑성(李甲成), 박희도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한강(漢江) 인도교위에서 만나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측의 대표자를 뽑았다. 이튿날인 27일에는 그의 집에서 기독교측 대표들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한 후, 이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한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 2016. 5. 25.
(호국형제 묘) 일병 유석오, 일병 유석환 -국립대전현충원- 유석오 일병 (1926.12.4.~1951.4.6.), 유석환 일병 (1935.4.15.~1951.4.6.)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한 유석오ㆍ유석환 일병 형제는 6ㆍ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31일 입대하여 군번 018005와 018014를 부여받고 국군 8사단 10연대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형제는 1951년 2월 강원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해 4월 6일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나란히 참전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당시 26세 유석오 일병과 17세 유석환 일병은 꽃다운 청춘을 마감하였고 전투가 벌어진 전남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에 잠들었다. 그로부터 50년 만인 2001년 5월 21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발굴ㆍ신원확인이 이뤄졌다. 이듬해인 2002년 4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에 .. 2016. 4. 27.
(수경사사령관) 소장 장태완 -국립대전현충원- 수경사사령관 소장 장태완 장태완은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1950년 육군행정종합학교를 11기로 수료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 보병2사단 연대장 등을 거쳐 5군단 작전참모로 월남전에 참여했던 그는 1971년 1월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육군사연구실장(1971),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참모장(1973), 사단장(1975), 육본 교육참모차장(1978) 등 여러 보직을 역임했다. 1979년 가을, 그는 수경사사령관(소장)에 취임했으나 불과 1개월 뒤 운명의 12·12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반란 진압 노력은 수경사 예하 연대장들이 잇따라 신군부 측에 가담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고, 그 역시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었다. 1979년 12월 13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간 그는 1.. 2016. 4. 17.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 -국립대전현충원-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 고향에서 증조부와 조부모, 부모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광진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47년 7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낸 후 1950년 6·25전쟁 개전 직후 대대장에 보직되어 1951년 9월까지 기계-안강전투, 영천회전, 원산전투, 영흥-함흥-성진진격전투, 현리지구 철수전투 등 각종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사단 작전참모,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교관 등을 거쳐 1956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을 지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사단장과 함께 혁명을 지지하였다. 이후 2군 작전처장을 거쳐 그해 8월에 준장으.. 2016.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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